금융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관리·감독의 문제다?
미국 금융위기의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국내 언론은 벌써부터 뒷수습이 한창이다. 주목할 대목은 신자유주의 금융 세계화의 구조적 모순을 둘러싼 논쟁이다. 일부 언론이 최근 금융위기는 관리와 감독의 문제일 뿐 시스템의 문제는 아니라는 주장을 들고 나오기 시작했다. 경제지들이 과도한 레버리지 투자의 위험을 경계하는 등 좀 더 실체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면 보수 성향 신문들은 여전히 정치적 관점에서 사태를 재단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22일 “제동 걸린 미국 금융 패권… 신자유주의도 막 내리나”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앞으로 미국을 비롯한 각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금융시장을 규제하고 나설 가능성이 크다”면서도 “당장 미국의 시대가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했다. 조선일보는 “아직은 미국을 대체할 새로운 경제대국이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가장 앞서 미국 금융 시스템을 변명하고 나선 곳은 문화일보다. 이 신문은 22일 “금융 선진화 구도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제목의 사설에서 “(최근 미국 금융위기를) 금융개혁을 후진시키는 빌미로 악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신문은 “금융위기가 신자유주의의 예정된 파탄이라는 시각도 1990년대 말 환란이 관치금융의 폐해라는 측면을 덮다시피 하고 신자유주의 때문이었다는 강변과 다를 바 없는 오류”라고 주장했다.
국민일보는 최근 민주당 김효석 의원이 기자 간담회를 자청해 자본시장통합법 재검토를 요구한 것과 관련, “미국형 금융시스템 자체의 부실이 아니라 관리·감독의 문제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자통법이 시행돼도 철저한 건전성 규제를 할 것이므로 별 문제가 없다”는 금융위 관계자의 말을 전하고 있다. 이어 23일부터 언론의 본격적인 반격이 시작됐다.
동아일보는 23일 “자동차 사고가 났다고 해서 무턱대고 엔진 결함으로 속단하면 안 된다”는 전광우 금융위원장의 말을 1면에 비중있게 실었다. 전 위원장은 “금융 시스템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한 건 분명하지만 신자유주의 혹은 금융자본주의의 종말로 보는 것은 과도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조선일보가 상대적으로 차분한 논조를 유지하고 있다면 동아일보와 중앙일보는 본격적으로 미국 신자유주의 시스템을 옹호하고 나서는 분위기다.
동아일보는 24일 “월가 투자은행은 저물어도 세계 투자은행 시장은 지지 않는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위기가 확대 해석돼 과잉 규제로 이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기 소르망 파리정치대 교수의 말을 비중있게 인용했다. 이 신문은 “금융 자본주의의 실패를 논하는 것은 견강부회”라는 김종석 한국경제연구원장의 말을 결론 대신 소개하고 있다. “한국 금융회사들은 여전히 투자은행 분야의 경쟁력을 더 키워야 한다”는 이야기다.
중앙일보 김종수 논설위원은 24일 “미국식 자본주의가 끝났다고?”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한가지 확실한 것은 미국 금융시장이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란 점”이라면서 “개인적으론 미국의 금융업도 이번 사태를 수습하고 나면 더욱 강력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란 생각”이라고 밝히고 있다. 김 위원은 “미국에 금융위기가 왔다고 세상이 끝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 일도 아니고 미국식 자본주의의 강점을 무작정 팽개쳐서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개인적인 생각이라고 밝히면서도 이를 지면에 담아내고 논리를 확대하는 용기도 대단하지만 이 와중에 미국식 자본주의의 강점을 거론하는 것은 더 놀랍다. 이처럼 보수 언론이 다급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본격적인 이데올로기 논쟁이 시작되기 전에 금융 규제 완화와 시장 활성화라는 이명박 정부의 정책 기조를 확립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짤방은 심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