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 김대중 대통령의 영결식이 오늘 오후에 열렸는데요. 김 전 대통령의 경제철학이었던 DJ노믹스에 대해 다시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 경기침체와 맞물려 DJ노믹스를 다시 공부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데요. 김 전 대통령의 사후,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불신과 맞물려 DJ노믹스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DJ노믹스가 2009년 한국경제에 어떤 시사점을 주는지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미디어오늘 이정환 기자 나오셨습니다.
(어제 CBS 시사자키 방송 내용입니다.)
– 김 전 대통령이 민주화와 남북평화에 크게 기여한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겠지만 경제정책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는 것 같은데요. 한쪽에서는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는 반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밀어붙이면서 당초 DJ노믹스의 원칙에서 크게 벗어났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았는데요.
= 네. DJ노믹스의 핵심철학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과연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병행발전을 했느냐, 정치적 민주주의를 정착시킨 건 사실이지만 경제적 민주주의는 오히려 후퇴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김 전 대통령의 최대 업적은 IMF 극복인데 이 과정에서 성과도 있었고 한계와 실패도 있었죠. 그런데 성과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고 한계와 실패는 여전히 지속되면서 부작용을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IMF 외환위기 직후 취임한 김 전 대통령은 과감하고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통한 신속한 위기극복을 핵심 과제로 내걸고 강력한 구조조정을 밀어붙였습니다. 대기업 부채비율 축소, 부실금융기관 퇴출,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 개선 등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기업재무구조 개선과 국내 재벌의 독과점해소, 투명성 제고 등이 IMF 극복의 성공 요인으로 꼽혔습니다. 물론 글로벌 스탠더드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은 많은 문제를 낳습니다. 함정도 있고요. 김 전 대통령은 IMF 극복을 넘어 한국경제의 고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대안으로 글로벌 스탠더드를 도입한 셈인데요. 이게 김 전 대통령의 발목을 잡게 됩니다.
– 방금 말씀하신 IMF 조기극복의 요인이 동시에 DJ노믹스가 비판받는 지점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 그렇습니다. IMF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DJ노믹스의 핵심원칙들이 후퇴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지금 2009년 우리 경제를 돌아보면 이해가 쉬울 텐데, 기업들이 막대한 규모의 현금 유동성을 쌓아두고 있으면서도 설비투자를 하지 않고 기업의 이익이 주주들에게 빠져나가고 있고 금융기관들이 사회적 책임 보다는 수익성 확대에 몰두하고 있는 현실은 10년 전 국민의 정부 시절부터 계속돼 온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대규모 정리해고와 노동 유연화가 국민의 정부 시절부터 본격화됐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사회 양극화가 심화된 것도 이때부터였습니다.
– 보수진영에서는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집권시기 실정을 비판하면서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수사를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명박 정부가 등장했다고도 볼 수 있을 텐데요. 그런데도 여전히 DJ노믹스가 주목받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요?
= IMF 조기극복의 비결은 공적자금 투입을 통한 기업회생이었습니다. 정부의 개입을 배제하고 시장원리를 맹신하는 신자유주의와는 기본철학이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명박 정부의 구조조정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나는데요. 특히 이번 쌍용차 파업의 경우 이명박 정부는 경쟁력 없는 기업은 망하게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었던 반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막대한 규모의 공적자금을 투입해 부실채권 처리와 금융 구조조정을 신속하게 진행했습니다. 과감한 결단력과 추진력이 돋보였는데요. 굳이 비유를 하자면 외과수술을 최대한 빨리 끝내고 치료에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수술을 미루거나 여기저기 자르고 찔러보면서 환자를 더욱 위중한 사태에 빠져들게 만드는 실수를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김 전 대통령이 쓴 ‘대중경제론’은 하버드대학 교재로 쓰이기도 했고요. 2008년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 세계적으로도 김 전 대통령의 구조조정 해법이 주목받기도 했습니다.
– DJ노믹스가 신자유주의와 결탁했다거나 아예 변질됐다는 비판이 많았는데요.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신자유주의 기조를 대폭 수용하긴 했지만 애초에 신자유주의와는 근본 철학이 다르다는 말씀이네요.
= 네. 신자유주의는 철저하게 자본의 이해를 반영하고 정부의 개입을 배제합니다. 김 전 대통령이 대규모 구조조정 과정에서 정리해고를 밀어붙이고 특히 노동운동 진영과 갈등을 빚긴 했지만 그 핵심에는 지속가능한 경제, 대기업 중심의 수출주도의 성장전략 대신 민중의 역할과 가치를 회복하고 시장경제 질서를 확립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습니다. 한계가 없는 건 아니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 덕분에 우리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서 빠져나와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설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의 경제 정책의 가장 큰 차이를 꼽는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 사회안전망이라는 단어도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가장 먼저 도입했습니다. 세계적으로 경기침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무분별한 통화정책이나 재정정책을 남발하면서 실패한 사례가 많았는데 김 전 대통령은 단기간에 강력한 구조조정을 마무리 짓고 난 뒤 사회안전망 확충에 주력했습니다. 워낙 어려운 시기였지만 중산층의 붕괴를 막는 게 최우선 과제라고 보고 여러 가지 대책을 내놓았는데요. 기초생활보장법과 실업급여제도 등을 정착시켰고 사회보장기금을 신설하는 등 민간중심의 시장경제를 육성하되 사회적 약자를 보호할 생산적 복지를 확충한다는 핵심원칙을 명확히 했습니다. 진보진영에서는 김대중 정부가 신자유주의와 결탁했다고 비난하기도 했지만 이런 부분들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시장에 맡겨둔다는 원칙 아래 정부 주도의 대규모 토목공사를 유일한 성장의 해법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반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오히려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시장의 한계를 보완하는 정책을 펼쳐왔습니다. 주주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는 차입형 우리사주제도를 제도화하기도 했지만 빛을 보지 못한 것도 안타깝습니다.
– 물론 공과 과가 있기 마련이겠지만 무분별한 금융시장 개방과 신용카드 사태, 부동산 가격 거품 등은 DJ노믹스의 실패로 평가받고 있지 않습니까.
= 네. 33개에 이르던 은행을 19개로 줄이는 등 대규모 금융 구조조정을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대부분 은행들의 외국인 투자자들 지분이 50%가 넘어서고 주주자본주의에 예속되는 등 부작용도 많았습니다. 신용카드 사태도 내수경기를 단기간에 끌어올리는 효과가 있었지만 심각한 후유증을 낳았고요. 부동산 가격 거품 역시 아직까지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에 넘어오면서 DJ노믹스의 이런 한계들이 수정·보완되기 보다는 오히려 더욱 확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DJ노믹스는 사회안전망 확충과 생산적 복지가 경제성장의 동력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DJ노믹스의 핵심이 정경유착과 부정부패, 도덕적 해이 등 경제위기의 근본원인들을 고치고, 개인의 노력과 능력에 따라 정당한 보상이 이뤄지는 시스템을 만들자는데 있다는 사실이 간과되고 있습니다.
– 1930년 대공황 이후 최악이라는 세계적인 경기침체를 맞고 있는 지금,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 민중의 역할과 가치가 회복된 새로운 시장경제 질서를 확립해야 한다는 DJ노믹스의 핵심철학을 다시 돌아보게 되는데요. 오히려 지금 현실은 거꾸로 가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