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연말부터 금융권 최대 화두는 국민은행 강정원 행장을 둘러싼 관치 논란이다. 강 행장은 지난해 12월3일 KB금융지주 회장에 선임됐다가 한 달도 안 된 12월31일, 돌연 사퇴했다. 불공정 시비 때문에 그만둔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정부와 금융당국의 압력에 굴복했다는 게 지배적인 관측이었다. 이에 앞서 금융감독원은 12월16일부터 23일까지 KB금융과 국민은행에 대한 강도 높은 사전검사를 시행한 바 있다.
금융권에서는 사외이사제도를 정비할 때까지 회장 공모를 연기하라는 금융당국의 지시를 무시하고 강 행장이 사외이사들과 결탁해 회장에 선임되자 금융당국에 괘씸죄로 찍힌 것으로 보고 있다. 청와대가 당초 회장 공모에 강 행장과 함께 지원했던 이철휘 자산관리공사 사장을 밀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 사장은 중도에 사퇴했다. 이를 두고 정부가 민간은행의 인사에까지 개입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거센 상황이다.
금감원이 국민은행 임원들의 PC를 압수하고 행장의 운전사들까지 불러다 조사하는 등 관치 논란이 확산되자 25일 은행연합회가 사외이사제도 모범규준을 내놓았지만 논란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이 규준에 따르면 앞으로 사외이사의 최조 임기는 2년, 전체 임기는 5년을 넘을 수 없게 된다. 해마다 20% 이상 사외이사를 교체해야 하고 이사회 의장은 특정 사외이사의 장기집권을 막기 위해 임기가 1년으로 제한된다.
KB금융 사태를 보는 언론의 시각은 크게 3가지로 나뉜다. 경향신문과 한겨레 등이 관치 논란을 확대 재생산하면서 정부를 비판하고 있는 가운데 조중동 등 보수성향 언론은 사외이사제도의 문제점을 부각시키면서 강 행장을 압박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경제지들은 정부가 민간기업의 인사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강조하고 있지만 주주 이익의 극대화를 최우선 가치로 두고 있어 한겨레 등 진보성향 언론과는 논조가 미묘하게 다르다.
한겨레는 18일 사설에서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는 식의 조사야말로 관치금융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면서 “금감원이 본래 임무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서 경영진 뒷조사나 하고 다닌다면 강 행장을 몰아내고 KB금융을 금융당국의 영향 아래 놓겠다는 의도 이외의 것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한겨레는 이번 모범규준에 대해서도 “당국의 자의적 판단과 재량권이 개입할 여지가 더 커진 셈”이라고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다.
반면 조선일보는 지난 11일 “나쁜 관치는 하고, 좋은 관치는 못하고”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경영진을 견제해야 할 사외이사를 회장 선출권이란 막강한 권한을 가진 권력집단으로 변질시키고 기존 경영진과 사외이사가 유착할 수 있는 구조적 결함을 갖고 있다”면서 사외이사제도에 비판의 무게를 실었다. 조선일보는 “은행은 주인이 비록 민간이라 하더라도 공공성이 있기 때문에 병든 은행에는 가차없이 관치가 취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가 관료주의의 폐해와 금감원의 과잉수사 의혹에 침묵하고 있는 것처럼 한겨레는 강 행장과 사외이사들의 유착 의혹을 축소하고 있다. 한쪽은 정부 입장을 두둔하기 위해, 다른 한쪽은 이를 비판하기 위해 외눈박이 논조를 펼치고 있는 셈이다. 조선일보는 여러차례 지적했지만 KB금융 뿐만 아니라 신한금융 라응찬 회장과 하나금융 김승유 회장 등의 장기집권에 사외이사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한겨레는 언급을 아끼고 있다.
IMF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 금융기관들은 영리기업으로 바뀌었다. 지배주주가 없는 탓에 주인 없는 은행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강 행장 등은 주주들의 이해를 충실히 대변하면서 그 대가로 경영권을 보장받아왔다. 사외이사들과 전문경영인이 결탁하는 양상도 발견된다. 금융 공공성이나 은행의 사회적 책임은 뒷전이다. 정부 지분이 없다고 해서 정부가 이를 마냥 방치하는 것이 과연 최선일까.
한겨레는 평소 경제지면 전반에서 자유주의 성향의 경제개혁연대의 논조를 답습해 왔는데 이번 KB금융 사태 보도에서도 마찬가지다. 경제개혁연대는 최근 논평에서 “KB금융의 주인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주주들”이라면서 “정부가 1주의 주식도 갖고 있지 않은 민간기업의 CEO 선출 과정에 개입하는 것을 허용하는 현행 법률은 어디에도 없다”고 주장했다. 이 대목에서는 시장에 맡겨두고 정부는 뒤로 빠지라는 경제지들의 주장과 다른 점을 찾기 어렵다.
물론 강 행장에 대한 청와대와 금융 감독당국의 직간접적인 압력을 정당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강 행장이 물러설 경우 청와대 의중이 반영된 낙하산 인사가 KB금융을 시작으로 금융권 전반으로 확산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그러나 이명박의 대안이 시장이 아니라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진보성향 언론이 이명박 정부의 관치를 비판하면서 금융 공공성을 부정하고 정부의 개입 자체를 배제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관치가 문제가 아니라 관치를 잘못해서 문제다. 노무현은 되고 이명박은 안 된다? 이명박은 그냥 손 떼고 물러나 있으라? 이런 비판은 진보진영에 두고두고 자충수가 될 수 있다. 관치가 아니면 그냥 시장에 내버려 두면 되는 건가. 은행의 주인은 주주들이라고? 주주가 아니면 입 다물고 있으라고? 나는 이명박도 싫지만 극단적인 주주 자본주의와 진보진영의 무지가 더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