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우리 경제에 남긴 성과를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가 2년 전 삼성 비자금 사건의 책임을 지고 경영 일선에서 퇴진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그가 했던 약속은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사상 최대 규모의 배임과 탈세, 천문학적인 규모의 차명계좌와 비자금 조성 등의 범죄를 저질렀지만 특별사면을 받고 그 뒤 3개월 만에 전격 경영일선에 복귀한 그를 보는 시선이 결코 고울 수는 없다.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24일 삼성전자 회장으로 복귀했다. 2008년 4월22일 퇴진을 선언한 이후 23개월 만이다. 이 회장은 삼성그룹 공식 트위터(@samsungin)에 다음과 같이 복귀 일성을 밝혔다.
“지금이 진짜 위기다. 글로벌 일류기업들이 무너지고 있다. 삼성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앞으로 10년 내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다시 시작해야 된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앞만 보고 가자.”
무작정 앞만 보고 달리다가 진짜 위기를 맞게 되지 않을까. 경제개혁연대는 성명을 내고 “이 회장의 복귀가 오히려 진짜 위기”라고 호된 비판을 쏟아냈다. 지금이 진짜 위기라고 하더라도 과연 이 회장의 복귀가 그 해법인지도 의문이다. 오히려 총수의 독단적인 결정에 의존하는 폐쇄적인 의사결정 시스템이 위기를 키우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된다. 이 회장의 복귀를 둘러싼 일련의 과정을 돌아보면 이런 우려가 더욱 굳어진다.
삼성그룹 커뮤니케이션팀 이인용 부사장은 “삼성 사장단협의회가 이 전 회장의 복귀 요청 건의문을 작성해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이 지난달 이 회장에게 전달했고 이 전 회장이 한 달 가까이 고심한 끝에 23일 수락했다”고 밝혔다. 겉으로는 독립 경영을 하는 것처럼 비춰졌지만 삼성은 지난 2년 동안 이 회장의 그늘을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 이 회장의 복귀는 삼성이 다시 특검 이전으로 회귀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삼성이 2년 전 발표했던 10가지 경영쇄신안은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첫번째, 이 회장의 퇴진은 이날 복귀로 원점으로 돌아갔고 두번째, 홍라희 여사의 사임 역시 큰 의미가 없게 됐다.
세번째, 삼성전자의 최고고객경영자(CCO)를 사임하고 해외 사업장을 개척하겠다던 이재용 전무는 오히려 부사장으로 승진을 했다.
네번째, 해체하겠다던 전략기획실은 사장단 협의회라는 형태로 남아있었고 다시 확대 개편될 예정이다.
다섯번째, 물러나겠다던 이학수 전 부회장도 여전히 비공식적으로 전략기획실 업무를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비자금 사건에 깊이 연루된 것으로 알려졌던 장충기 사장과 최광해 부사장 등도 여전히 남아있다.
여섯번째, 수천억원의 차명자산을 실명으로 전환하고 유익한 일에 쓰겠다고 약속했지만 역시 지켜지지 않았다.
일곱번째, 삼성생명과 삼성증권 등 금융 계열사의 투명성을 높이겠다는 약속도 마찬가지다. 퇴진하겠다던 배호원 전 삼성증권 사장은 삼성정밀 사장으로 갔고 황태선 전 삼성화재 사장은 거액의 스톡옵션을 받았다.
여덟번째, 직무상 연관이 있는 인사를 사외이사로 선임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고 아홉번째, 지주회사로 전환하겠다는 약속은 요원하고 열번째, 대외적으로 삼성을 대표한다는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은 이 회장의 복귀 전까지 말 그대로 얼굴마담 역할만 했다.
참여연대 이송희 팀장은 “현재의 글로벌 전자시장은 오너 1인의 비정상적 기업지배를 위한 통제와 관리라는 구시대적 경영으로는 결코 경쟁력을 가질 수 없는 환경”이라면서 “전략기획실 부활은 삼성에게 기회가 아닌 위기가 될 뿐”이라고 지적했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삼성의 의사결정이 잘못됐을 때 그것을 조기에 포착하고 수정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면서 “삼성의 지배구조상의 문제는 삼성의 사업상의 위험을 제어하기보다는 오히려 증폭시키는 요소로 작용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25일 주요 신문이 이 회장의 복귀를 비중있게 다루고 있는데 이 같은 문제를 제대로 짚고 있는 곳은 거의 없다. “앞만 보고 가자”는 이 회장의 교시를 받들어 이 회장의 복귀에 당위성을 부여하고 있을 뿐이다.
한국경제는 “이 회장이 직접 나서 강력한 리더십을 구축하지 않으면 미래를 내다보는 그룹 경영과 사업구조 재편이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적지 않았다”면서 “이 회장의 복귀로 창조의 삼성을 만들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더욱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고 장밋빛 전망을 늘어놓았다. 머니투데이는 “한국의 스티브잡스가 돌아왔다”는 삼성증권의 보고서를 소개하기도 했다.
매일경제는 사설에서 “경영 일선에 복귀하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제2의 성공신화를 국민 앞에 증명하는 것 뿐”이라며 “전 세계가 분초를 다투며 속도경영을 하는 전장에서 최고의 지식경영을 이뤄내 줄 것을 당부한다”고 밝혔다. 서울경제도 사설에서 “이 회장 특유의 창의적 리더십과 경영능력의 발휘로 삼성의 입지를 더욱 튼튼히 하고 나아가 과감한 투자와 일자리 창출을 통해 우리 경제가 활력을 회복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한 누리꾼은 이를 두고 “솔방울로 수류탄이라도 만들 기세”라고 비꼬기도 했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에 대한 우상화와 다를 게 뭐냐는 이야기다. 점심 먹으러 나서는 삼성전자 직원들의 환한 표정을 담은 사진을 쓴 곳도 많았다. 이 회장이 탁월한 영도력을 발휘해서 위기를 극복하고 삼성을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면 다행한 일이겠지만 한 나라의 경제가 특정 개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건 아찔한 일이다. 한국 사회는 삼성 특검 이전으로 회귀했다. 삼성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고 추락한 정의 역시 여전히 바닥에 내팽겨진 채 그대로다.
– 2007년 10월 : 김용철 변호사, 삼성그룹 차명계좌 50억 비자금 폭로.
– 2007년 11월 : 김용철 변호사, `회장 지시 사항` 등 문건 공개
– 2007년 12월 : 조준웅 변호사 특검 임명
– 2008년 1월 : 삼성 특검팀 구성 및 수사개시, 이건희 회장 집무실·이학수 부회장 자택·삼성 본관 등 압수수색
– 2008년 2월 : 특검, 이학수 부회장·이재용 삼성전자 전무 등 소환
– 2008년 3월 : 특검, 수사기간 30일 연장, 삼성생명 본관 압수수색
– 2008 년 4월 : 홍라희 리움미술관장 특검 출두·이건희 회장 소환·특검 수사기간 15일 연장
– 2008년 4월 : 삼성특검 수사 결과 발표, 이건희 회장 등 10명 기소·이건희 회장 퇴진
– 2008년 6월 : 이건희 회장 등 공판
– 2008년 7월 : 이건희 전 회장, 이학수 전 부회장, 김인주 전 사장 집행유예 5년 , 에버랜드 전환사채(CB) 저가발행 혐의 등 무죄 선고. 특검 및 이건희 회장 항소
– 2008년 8월 : 이건희 전 회장 등 항소심 공판
– 2008년 10월 : 항소심 선고, 이건희 전 회장 징역3년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원, 이학수 전 부회장 징역 5년 에 집행유예 5년 및 사회봉사 320시간, 김인주 전 사장 징역 3년 에 집행유예 5년 및 사회봉사 320시간, 최광해 전 부사장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4년 및 사회봉사 240시간 선고, 에버랜드 전환사채(CB) 저가 발행과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저가 발행 혐의 무죄.
– 2009년 5월 : 대법원, 에버랜드 CB사건 상고 기각, 삼성SDS BW 사건 원심 파기 환송
– 2009년 8월 : 서울고등법원, 삼성SDS사건 유죄판결. 이건희 전 회장 징역3년 , 집행유예 5년 . 벌금 1100억원 선고
– 2009년 12월 : 정부,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해 이건희 전 회장 특별사면
– 2010년 1월 : 이건희 전 회장 미국 CES 참석 “경영복귀 생각중”
– 2010년 2월 : 이건희 전 회장 “삼성, 약해지면 돕겠다” 복귀시사 발언
– 2010년 3월24일 : 삼성전자 회장으로 공식 경영복귀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