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올해 경제성장률을 5.2%로 전망했다. 12일 한은이 발표한 성장률 전망은 지난해 12월보다 0.6% 포인트 상향 조정됐는데 만약 이런 전망이 실현된다면 올해 우리나라는 4년 만에 가장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게 된다. 한은의 전망은 지난해 7월 3.6%에서 지난해 12월 4.6%로 뛰었다가 다시 5.2%로 뛰어올랐다. 이날 한은은 경기 회복을 전망하면서도 출구전략은 이르다고 못 박았다.
지난해 12월까지만 해도 전기 대비 성장률이 상반기 0.7%, 하반기 1.1%라고 전망했는데 이날 발표에서는 상반기 1.2%, 하반기 1.0%로 뒤바뀌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저하고’에서 ‘상고하저’로 바뀐 셈이다. 물가 상승률도 2.6%로 0.2% 포인트 낮춰 잡았다. 경상수지 흑자가 지난해 427억달러에서 올해 105억달러로 줄어들 거라는 게 그 이유다. 한은의 이런 전망은 성장에 중심을 두는 정책 목표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성장률 5.2%면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 이전인 2006년 수준을 회복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2006년 성장률은 5.2%, 2007년에는 5.1%, 2008년에는 2.1%, 지난해에는 0.2%를 기록했다. 그러나 한은은 상고하저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하반기에 경기가 둔화될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물가 상승률을 낮춰 잡은 것도 당분간 경기확장 정책을 계속할 거라는 관측을 뒷받침한다.
한은 조사국 이상우 국장은 출구전략을 앞당겨야 하는 것 아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4.6%에서 5.2%로 전망치가 올라갔지만, 의미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면서 “경제가 빠른 속도로 회복한다는 점에서 4.6%나 5.2%나 큰 차이는 없다”고 말했다. 현대경제연구원 유병규 경제연구본부장은 “경기는 회복하지만 물가는 안정될 거라는 전망에는 성장과 회복에 무게를 둔 통화정책을 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고 지적했다.
김중수 총재가 취임 전후 출구전략을 앞당길 필요가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여러 차례 한 것도 주목된다. 김 총재는 총재 내정 직후 한은의 독립성을 강조하며 할 말은 하겠다고 소신을 밝혔으나 최근에는 성장에 방점을 찍고 있다. 한은이 기획재정부 남대문 출장소로 전락한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 총재는 금리가 비정상적으로 낮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출구전략은 아직 이르다는 앞뒤가 안 맞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김 총재의 이 같은 행보는 이명박 정부 초기 “환율을 시장에 맡겨두는 나라가 없다”면서 환율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렸다가 금융위기를 가속화했던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을 떠올린다. 김 총재는 9일 기자회견에서 “아직도 경제가 허약한 상태지만 지금 경제 상황은 예전과 많이 변했다”며 “이제는 새로운 경제 상황에 따라 정책이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가계 부채는 걱정할 정도가 아니라고 본다”고 밝혀 이 전 총재와 입장이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하기도 했다.
매파로 꼽혔던 이 전 총재와 달리 김 총재는 비둘기파로 꼽힌다. 정부와 갈등을 빚거나 시장에 충격을 주기 보다는 정부 정책에 적극적으로 동조할 거라는 관측도 나온다. 금융시장에서는 출구전략이 하반기 이후로 늦춰질 거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취임 직후 “한은의 정치적 독립이 대통령으로부터의 독립은 아니라고 본다”고 말한 것도 구설수에 올랐다. 대통령으로부터의 독립이 아니면 무엇으로부터의 독립이란 말일까.
인플레 파이터로서 한은 총재의 책임을 방기하고 성장 정책에 동조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된다. 한 금융시장 관계자는 “김 총재의 최근 행보를 보면 제대로 뜨기도 전에 추락한 747의 악몽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한은 총재라면 가계부채가 위험한 수준이 아니라거나 중산층의 빚이 대부분이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등의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 한다”면서 “물가 상승률을 낮춰 잡은 것도 근거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