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닥터 둠이다. 누리엘 루비니 미국 뉴욕대 교수는 별명처럼 쓴 소리를 쏟아냈다. 세계 경제가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에서 막 빠져나와 겨우 한숨을 돌리고 있는 이때 루비니는 위기는 이제 시작일 뿐이고 훨씬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라고 경고한다. 서브프라임 사태를 예견했던 거의 유일한 경제학자, 루비니의 전망은 예리하고 섬뜩하다.


루비니는 우선 서브프라임 모기지론과 부동산 거품이 위기의 근본 원인이 아니라고 본다. 루비니는 “서프브라임 모기지론과 불량 채권의 증권화는 이 체계적으로 부패한 깊은 문제의 분명한 조짐이었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세계적으로 금융 시스템이 송두리째 흔들리면서 레버리지와 빚으로 세워진 셀 수 없이 많은 경제의 탑도 흔들리게 됐다”는 이야기다.

루비니는 금융 시스템의 도덕적 해이를 근본 원인으로 지목한다. 윌리엄 맥체스니 마틴 주니어 전 연방준비은행 행장은 “연방준비은행의 역할은 파티가 시작되자 마자 칵테일 잔을 치우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2000년 닷컴 거품이 꺼졌을 때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은 오히려 알콜 음료에 알콜을 더 쏟아부었다.

미국은 9·11 테러 이후 금리를 끌어내려 경제 전반에 거품을 키웠다. 꺼져가는 거품을 다른 거품으로 채우면서 도덕적 해이를 방조했다는 게 루비니의 지적이다.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업무를 구분했던 글래스-스티글법을 폐지한데 이어 대대적인 금융규제 완화도 단행됐다. 이제 와서 돌아보면 서브프라임 거품은 그 필연적인 결과였다.

루비니는 은행처럼 보이고 은행처럼 행동하지만 거의 아무런 규제를 받지 않은 ‘그림자 은행’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들은 유동성이나 레버리지, 자기자본에 대한 제약이 없기 때문에 엄청난 이익을 내면서도 정작 위기에 취약했다. 이들은 예금자 보호 등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갖추지 못했지만 세계 경제를 뒤흔들 정도의 엄청난 규모로 성장했다.

루비니는 “느슨한 통화정책과 무모한 금융혁신, 도덕적 해이의 문제와 통일된 정책의 부재, 그림자 은행 시스템과 결합된 손쉬운 외국의 돈이 이 전대미문의 재앙을 불러왔다”고 설명한다. “금융 시스템의 거의 모든 사람이 부채와 과도한 레버리지에 의존했고 이것이 불가피한 재앙을 촉발시킨 핵심적인 요인”이라는 이야기다.

‘그림자 은행’의 진짜 문제는 위험을 평가할 수 없다는데 있다. 파이낸셜타임즈의 지적처럼 진짜 두려운 건 수면에 떠 있는 시체가 아니라 수면 아래에 시체가 얼마나 더 있는지, 언제 떠오를지 알 수 없다는데 있다. CDO나 CDS 같은 부실 정도를 가늠할 수 없는 파생상품에 누가 얼마나 투자했는지조차도 파악이 안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위기에서 주목할 또 다른 현상은 미국의 위기가 순식간에 세계 전역으로 확산됐다는 사실이다. 연준이 금리를 끌어내리면서 달러화 가치가 떨어졌고 영국과 일본 등 미국 수출에 의존하던 나라들은 불황에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안전자산 선호현상이 확산되자 다시 달러화 투자가 늘어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서브프라임 사태가 미국의 특수한 상황인 것처럼 이해되고 있지만 부동산 거품은 세계적인 현상이었다. 주요 선진국들 주거용 부동산 가치는 2000년에서 2005년 사이에 두 배나 뛰어 올랐다. 시세차익은 40조달러, 이들 나라의 국내총생산(GDP) 합계와 맞먹는 규모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역사 이래 유례가 없는 거품”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루비니는 “미국의 상황은 물론 좋지 않았고 다른 어떤 나라보다 부실 대출이 많았지만 세계에서 가장 끔찍한 상황은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낮은 금리와 낮은 저축률, 부동산 거품이 불러온 경기 과열, 그리고 미국의 쌍둥이 적자와 글로벌 불균형은 어디에선가 터질 수밖에 없는 시한폭탄이었다는 이야기다.

루비니가 여전히 암울한 전망을 거두지 않고 있는 건 위기 대응 방식에 문제가 많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연준은 서브프라임 사태 직후 양적완화 조치를 단행해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했다. 장기 유동화 증권이나 장기 국채를 사들이기도 했다. 최후의 대부자를 넘어 최후의 투자자로 직접 시장에 뛰어든 셈이다.

루비니는 엄청난 대가가 따를 것이라고 경고한다. 무엇보다 미국의 위상이 과거와 다르다. 미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공부채의 비율은 두 배로 늘어났고 향후 10년 동안 재정적자가 9조달러 이상으로 불어날 전망이다. 미국은 세계 최대의 부채 보유국이면서 순채무국이다. 적자 재정지출만으로 위기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거라는 이야기다.

“정부는 문제의 공격적 해결책 대신 인내에 기반한 구제책을 선택했다. 미국은 문제 있는 은행을 국유화하지 않았다. 오직 자금을 지원하고 손해를 보상해줘서 목숨을 부지하게 해줬을 뿐이다. 이런 은행의 상당수가 지급 불능상태였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구제조치는 좋은 은행과 나쁜 은행에 차별을 두지 않았다.”

루비니는 “우리가 케이크를 그대로 들고 있는 것과 먹어치우는 일을 동시에 할 수 없다”고 비유한다. 자본주의 경제가 원래의 생명멱을 회복하게 하는 동시에 위기 이전에 잘못된 결정을 내렸던 이들을 모두 구제할 수는 없다. 유쾌하지 않은 진실이지만 지금까지 외면해온 사실이기도 하다.

루비니는 “부주의한 대부자들에 대한 구제책은 미래에 더 부주의한 행동을 쉽게 불러올 수 있으며 그 다음에는 더 큰 거품과 위기가 닥쳐올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루비니는 “금융위기는 그냥 잊어버리기에는 너무나 끔찍한 사건이지만 이로 인해 아주 잠깐 동안이라도 세계의 금융 시스템을 개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고 지적했다.

“참호에 모인 병사들치고 무신론자 없다는데 위기 상황에서는 그 어떤 자유주의자도 없을 것이다.” 루비니는 제프리 프란켈 하버드대 교수의 말을 인용하면서 “우리는 구조적인 문제점들이 위기를 불러오는 위험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강조한다. 루비니는 “위기가 되풀이되는 것을 막고 신뢰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개혁을 계속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루비니는 대안으로 단기 실적에 집중하는 금융계 보수 시스템의 개혁과 파생상품의 강력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CDO와 CDS 등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장치도 필요하다. 신용평가기관이 평가 대상과 유착하는 연결고리도 끊어야 한다. 루비니는 또한 글래스-스티글법 시절로 돌아가 금융기관들의 업무를 분리하고 칸막이를 복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른바 소시지 증권이라고 불렸던 CDO에 대한 평가도 흥미롭다. “증권화의 문제는 그 재료가 알아볼 수 없도록 썰고 다져졌다는 것보다는 애초에 준비된 재료 자체의 품질이 좋지 않다는데 있다. 판매 보다는 생산의 문제가 더 크다. 가장 큰 문제는 제일 처음 만들어진 대출의 신용도다. 결국 먹을 수 없는 구역질 나는 소시지일 뿐이다.”

루비니는 또 “투자은행을 포함한 모든 은행이 어떤 종류의 위험한 자기자본 매매를 하지 못하도록 제한해야 한다”면서 “헤지펀드나 사모펀드 사업도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본을 조달하고 증권을 발행하는 등 원래의 분야에만 매진하게 해야 하고 자기자본 매매 사업은 헤지펀드에 넘겨주면 된다”는 이야기다.

루비니는 “금융계와 정치권의 유착이 계속되는 한 도덕적 해이는 계속될 것”이라면서 “금융기업의 로비 능력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루비니의 해법은 “금융 백화점 모델은 이미 실패했다”면서 “씨티그룹이나 골드만삭스 같은 대마불사 기업들을 해체해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설명하는 금융 시스템은 서로의 영역이 구분되고 살균 처리까지 된 재미없는 시스템이다. 은행은 예금으로 받은 돈을 안전하게 단기로 투자하는 더 재미없고 지루한 곳이 돼야 한다. 엄격한 규제와 감독 뿐만 아니라 거품이 형성되는 순간부터 이를 막아낼 수 있는 중앙은행의 권한행사 같은 좀 더 체계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

루비니는 “위기는 오지만 방법은 있다”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지난 60여년 동안 미국과 미국의 달러는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해 왔지만 그 시절의 종막이 다가오고 있다. 그런 힘든 시기를 어떻게 이겨내느냐에 따라 앞으로 다가올 위험을 막아낼 수 있을지 없을지가 결정될 것이다.”

루비니는 “미국이 재정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민간저축을 늘리지 못한다면 달러화의 몰락은 불가피하다”고 강조한다. “수백년된 은행 금고를 열었더니 그동안 모아둔 귀중한 금화가 먼지로 변한 것 못지 않은 엄청난 충격을 줄 것”이라고 경고한다. 인플레이션이 달러 가치를 잠식할 것이고 세계적으로 달러 투매 현상이 벌어질 수도 있다.

루비니는 “앞으로 미국의 위상은 점점 추락할 것이며 위기는 더 잦아지고 극악해질 것”이라면서 “최근의 금융재난은 앞으로 닥쳐올 위기의 전초전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루비니는 “규제받지 않은 시장이 내재적 안정성, 효율성, 회복력을 갖고 있다고 하는 유효기간이 지난 생각은 그만 폐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금융위기가 궁극적으로 세계화에 대한 반발을 불러올 것이라는 지적도 흥미롭다. 루비니는 “금융은 세계화됐지만 그에 따른 규제는 국가 단위에 머물러 있다”면서 “이러한 요인이 전 세계적인 위기의 발생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고 경고한다. 세계 경제가 대 불안정기에 들어섰으며 자산거품과 붕괴현상이 더 자주 발생할 거라는 이야기다.

“이번 위기를 겪으면서 위기가 제공하는 개혁의 기회를 낭비한다면 더 끔찍한 위기의 씨앗을 뿌리는 셈이 될 것이며 이 기회를 이용하지 못하면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루비니의 경고는 준엄하다. 경제학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위기란 그냥 낭비하기에는 너무나도 끔찍한 사건이다.

정부가 통화정책과 강화된 규제를 사용하고 더 광범위한 사회안전망을 제공하고 수입과 부의 불균형을 줄이는 세금 시스템을 도입하고 위기의 근본원인이 되는 경제 불균형을 양산하지 않도록 경제정책을 조율하는 좀 더 큰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게 루비니의 대안이지만 현실은 그와 정반대로 가고 있다. 그래서 위기는 현재진행형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누리엘 루비니 지음 / 허익준 옮김 / 청림출판 펴냄 / 2만2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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