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하느님의 말씀과 성경을 서로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이 기록한 것이다. 성경은 최선의 기록이겠지만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다. 간단하게는 번역본 성경이 히브리어 원본 성경을 완벽하게 담아내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역사적 사실과 역사의 기록이 다를 수 있는 것처럼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과 다를 수 있다. 하느님의 말씀 또는 가르침에 마음을 열어놓지 않고 성경의 자구 해석에 매달리는 것 역시 우상 숭배다.
성경에는 물론 예수가 결혼했다는 이야기가 없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예수가 결혼하지 않았다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알려져 있지 않을 뿐 그는 결혼을 했을 수도 있고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결혼을 했다면 아들이나 딸을 낳았을 수도 있고 낳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는 예수의 삶에 대해 얼마나 잘 아는 것일까.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면서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고 외쳤다. 그는 사람의 몸으로 태어난 하느님이었지만 사람으로 그 모든 고통을 감당해냈다. 그는 사람으로 살았고 사람으로 죽었다. 그가 결혼을 하고 섹스를 하고 아이를 낳았다는 건 오히려 굉장히 자연스러운 이야기다. ‘다빈치 코드’는 과장됐거나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지만 언뜻 그럴 듯해 보인다. 예수가 결혼을 했다고?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So, What?”
이 책 또는 영화의 재미는 예수의 비밀에 있는 게 아니라 예수에 대한 우리들의 편견과 오해에 있다. 그가 죽은 뒤 2천년 가까이 그런 편견과 오해가 계속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운 것이다.
예수가 결혼했다는 사실이 왜 비밀이 되는 것일까. 시온 수도회는 목숨을 걸고 이 비밀을 지키려고 하고 오푸스데이는 숨기거나 영원히 묻어두려고 한다. 예수의 결혼이 그의 신성(神性, sanctity)에 위배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사람으로 이 땅에 내려왔는데 우리는 사람인 그를 신으로 떠받들고 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들고 앉은뱅이에게 일어나 걷도록 명령하고 호수 위를 걷고 떡 다섯 조각으로 5천명을 먹이는 전지전능한 신, 그런 그가 여성과 사랑을 나눴다는 사실을 선뜻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자칫 그가 신이 아니라 사람일뿐이라는 증거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을, 그리고 예수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하느님은 왜 사람의 몸으로 이 낮은 곳까지 내려오셔야 했을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가 보여준 놀라운 기적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몸으로 내려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하느님의 대속(代贖), 그리고 그의 사랑을 믿는 것이다. 그가 우리를 구원해줄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의 대속과 사랑을 믿고 받아들일 때, 그때 구원은 따라오는 것이다.
예수는 곧 하느님이지만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신성을 버리고 기꺼이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내려왔다. 그런데 우리는 2천년 동안 예수를 신격화해 왔다. 예수의 결혼이 비밀에 부쳐져 왔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닐 만큼 그의 인성(人性)은 철저히 부정돼 왔다. ‘다빈치 코드’의 재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하느님이면서 사람인 예수의 이중성, 그리고 우리의 편견과 오해를 날카롭게 파고 든 것이다.
물론 ‘다빈치 코드’의 가정은 대부분 과장됐거나 지어낸 것이다. 소설은 소설로 영화는 영화로 받아들이면 되겠지만 성경이 사람의 손으로 쓰여 편집됐다는 사실, 그 과정에서 예수의 결혼이 고의로 누락됐을 수 있다는 가정은 꽤나 그럴 듯하고 흥미롭다.
흔히 착각을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가 성매매 여성이었다는 기록이 성경에는 없다. 막달라 마리아는 성경 곳곳에 등장하고 여성들 가운데서는 늘 가장 먼저 이름이 나온다. 예수가 광야에 나간 때가 서른살 무렵, 그때까지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건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고도 한다. 성경은 아니지만 빌립복음에는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를 제자들 가운데 가장 사랑했고 자주 입맞춤을 했다고도 적혀있다.
그러나 더 흥미로운 것은 예수의 결혼이 예수의 신성에 위배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여전히 많다는 것이다. 예수의 결혼이 진실이냐 아니냐와는 또 다른 문제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예수의 결혼이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다빈치 코드’의 주장이 책이나 영화 이상의 관심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이 글은 지나치게 예수님의 결혼과 섹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 초점이 잘못됐다. 시온 수도회의 실존 여부를 떠나서, 예수님의 결혼이 문제되는 것은 성경에 기록되고 있지 않은 사실이라는 것이고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음에도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결혼을 했다 하더라도 결혼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빈치 코드에서 전제로 하는 것은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 즉 기독교의 가치라는 것은 예수가 죽고 다시 ‘부활’한 데서 오는 것인데 그저 ‘예수는 약간 비범한 인간이어서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사는 와중에 이런저런 사회개혁을 꿈꾸고 시도하다가 잡혀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라고 얘기하고 있다.
사람들이 예수의 결혼(을 왜 섹스와 등가로 생각하는 지 모르겠다만, 다빈치 코드의 가정(if)이 후손(자녀)이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섹스가 수반되겠지. 섹스없는 결혼도 있냐는 식의 질문은 논외로 하고.)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아마도 중세 시대의 천주교가 섹스 내지는 섹스로 대표되는 쾌락에 대해서 쉬쉬하고 죄악시 했던 속성이 지금까지 남아 있어서가 아닐까 생각된다. 성경은 결혼을 통한 성에 대해서 밝히고 있기도 하거니와 그것을 즐기는 것에 대해서 전혀 죄악시 하고 있지 않다. 다빈치 코드에도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장면이 등장하지만 성경은 그런 식의 자학을 결코 얘기하고 있지 않다. 중세의 천주교가 성을 죄악시하고 감췄던 이면에 추악함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성경을 우리가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가 라고 했는데 이해 이전에 온전한 텍스트에 대한 인지가 필요하겠다. 예수는 사람의 몸으로 온 것이지 신성을 버린 것이 아니다. 예수는 신의 자리를 잠시 놓고 왔다가 그 자리로 되돌아갔을 뿐이다. 즉, 인성과 신성이 동일하게 내재돼 있으신 분이셨다.
말 그대로 ‘신격화’는 신이 아닌데 신의 위치에 놓는다는 것이다. 잘못된 전제에 의한 오류다.
예수의 결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과연 그것이 비밀에 부쳐졌다고 하더라도 과연 그것이 ‘예수 인성의 철저한 부정’과 동일시 하는 것도 논리에 맞지 않다. 네 글 서두에 시작한 것처럼, 성경은 예수의 인성이 십자가 형과 죽음의 고통이 견디기 힘들어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나님께 소리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경은 예수의 인성에 대해서 ‘치명적일 수 있는 부분까지도 소개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예수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을까와 하나님은 왜 사람의 몸으로 내려왔을까 같은 질문은 이 글의 맥락에서도 벗어날 뿐더러 ‘하나님인데 사람의 몸으로 내려올 필요가 있었을까’같은 함의를 품고 있어서 읽는 사람에게 부지중에 편견을 준다. 게다가, ‘하나님의 대속’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속량해 주시기 위해서 아들 예수를 보낸 것이지 뭔가 인간에게 미안하고 찜찜해서는 아니다. 즉, 인간의 대속을 위해서지 하나님의 대속이 아니란 얘기다. 예수가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사실과 그의 사랑(이게 대체 무슨 의미인지 역시 모르겠다)을 받아들일 때 구원에 이른다는 것 역시 성경이 얘기하는 것과 다르다. 또, 그렇게 해서 받는 구원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마음의 안식? 심신의 평안?
다시 요약하자면, 예수의 결혼이 예수의 신성에 위배돼서가 아니다. 결혼이야 하면 또 어떤가. 게다가 성경이 네 말처럼 그걸 빠뜨리거나 삭제된 상태라고 하자. 그러면 또 어떤가. 문제는 사람으로 나서 사람으로 죽어버리고 썩어버렸는가 아니면 사람으로 와서 죽었지만 부활했는가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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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성급하게 쓰고 있다는 느낌인데, 게다가 이런 좁은 입력창에 쓰는 것이 쉽지 않기도 하고.
네 글을 본 느낌을 얘기하자면, 전체적으로 ‘가정’과 ‘사실명제’가 뒤섞여 있어서, 즉 너의 태도가 글 전체에서 이리저리 뒤바뀌고 있어서 글의 논지가 잡히지 않는다. 아무튼, 이런 글은 글도 태도도 아쉽다.
기독교 고등학교를 다닐때
천주교 성서는 77권인데 기독교는 66권이라고 배운뒤에
기독교에 대한 불신이 더욱 깊어 졌습니다.
뭐 그렇다고 초기 히브리어 성경이라고 해서 신의 뜻 그대로가 적혀 있는것은 아니겠지만
아무래도 2천년 동안 사람손을 타고 많은 전달과 번역 과정을 겪는 동안 사람들의 의도가 들어갈 수 밖에 없겠죠.
그러니 이제와서는 이런 소설, 영화도 나오는 거겠구요.
뭐 어떻습니까. 재밌다는데요.
뭔가 매트릭스를 경험한 듯한 느낌일까요? -아직 보진 못해서..-
기독교 고등학교를 다닐때
천주교 성서는 77권인데 기독교는 66권이라고 배운뒤에
기독교에 대한 불신이 더욱 깊어 졌습니다.
뭐 그렇다고 초기 히브리어 성경이라고 해서 신의 뜻 그대로가 적혀 있는것은 아니겠지만
아무래도 2천년 동안 사람손을 타고 많은 전달과 번역 과정을 겪는 동안 사람들의 의도가 들어갈 수 밖에 없겠죠.
그러니 이제와서는 이런 소설, 영화도 나오는 거겠구요.
뭐 어떻습니까. 재밌다는데요.
뭔가 매트릭스를 경험한 듯한 느낌일까요? -아직 보진 못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