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C, 메릴린치에 20억달러 투자… 국부펀드의 수익률 게임 무조건 환영할까
한국투자공사(KIC)가 미국 투자은행 메릴린치에 20억달러를 투자했다. 환율 950원 기준으로 1조9천억원이다. 메일린치는 15일 KIC를 비롯해 쿠웨이트투자공사, 일본 미즈호금융그룹 등으로부터 모두 66억달러 규모의 투자를 유치했다고 발표했다. 16일 주요 경제지들은 이 소식을 비중있게 전하고 있다.
KIC와 메릴린치에 따르면 KIC가 인수한 20억달러 규모의 의무전환 우선주는 9% 배당을 받는 조건이고 인수 후 2년9개월 되는 시점에 보통주로 전환된다. KIC는 메릴린치의 지분 현재 기준으로 3.1%를 확보, 5대주주로 올라서게 된다. 투자자금은 현재 운용중인 200억달러가 아닌 정부로부터 별도 자금을 받아 마련할 계획이다.
KIC는 보도자료를 내고 “미국 금융시장이 안정되기까지 2~3년간은 9%의 안정적 배당을 받고 시장이 안정된 이후에는 보통주로 전환하여 주가상승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이점을 갖게 됐다”고 평가했다. KIC는 또 “투자수익 원천을 다양화하는 한편 글로벌 자산운용사로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동시에 동북아 금융허브 추진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고 장밋빛 전망을 늘어놓았다.
KIC는 외환보유액을 위탁 운용하는 기관이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은 2622억달러. 환율 950원 기준으로 249조원에 이른다. 중국과 일본, 러시아, 인도, 대만에 이어 6위 규모다. 외환보유액은 외환위기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한국은행이 환율 하락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달러화를 사들이면서 부쩍 불어났다. 달러화 가치가 폭락하면서 앉은 자리에서 고스란히 손실을 보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은행을 외환보유액을 그동안 미국 국채 등으로 운용해 왔는데 최근 투자 다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KIC는 이 가운데 200억달러 규모를 위탁받아 운용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이른바 국부펀드인 셈이다.
짚고 넘어갈 문제는 이 천문학적인 규모의 외환보유액이 모두 국민들의 세금으로 조성됐다는 사실이다. 당장 외환보유액을 줄일 방법이 마땅치 않은 상황이라면 안정적이면서도 수익률 높은 투자 대상을 찾는 게 관건이지만 과연 지금 이 시점에서 몰락하는 미국 월스트리트에 투자하는 것은 최선의 선택일까.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가 아직 진정되지 않은데다 메릴린치를 비롯한 투자은행들은 사상 최악의 실적을 기록하고 있는 상황이다.
경제지들은 세계적인 투자은행의 지분을 사들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뿐 정작 그 투자가치나 위험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메릴린치가 15일 언론에 배포한 보도자료에 따르면 KIC가 이번에 인수한 의무전환 우선주의 2년 9개월 뒤 전환 가격은 52.4달러다. 1월11일 기준으로 3일간 주가를 평균한 가격이다.
지난해 12월, 싱가포르의 테마섹홀딩스가 메릴린치 보통주에 44억달러를 투자, 10%에 이르는 지분을 확보한 것과 비교해도 KIC가 싼 가격에 샀다고 보기는 어렵다. KIC는 2년 9개월 동안 9%의 배당을 받게 되지만 최종 수익률은 2년 9개월 뒤 주가 추이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메릴린치의 주가는 지난해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 거침없이 추락하고 있다. 지난해 이맘 때와 비교하면 거의 절반 가까이 빠진 상태다. 2년 9개월 뒤 주가를 예측하기는 쉽지 않지만 미국 금융시장의 불안이 아직 해소되지 않은 상황이라는 걸 감안하면 지금 주가가 낮다고 볼 수도 없다. 월스트리트가 이렇게까지 흔들릴 거라고 반년 전에는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지나치게 비관적일 필요는 없지만 최근 미국 금융시장을 돌아보면 메릴린치의 주가가 지금보다 더 빠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국경제는 16일 <"서브프라임이 공격 투자 호기">에서 “외환위기 때는 우리가 자금이 부족해 글로벌 투자은행에 매달렸지만 지금은 상황이 역전됐다”면서 “한국이 세계 금융위기를 완화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입장에서도 세계적인 투자은행의 글로벌 금융 노하우를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지분을 일부 인수하는 것과 이들의 금융 노하우를 배우는 것과는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을까. 경제지들이 쏟아내는 장밋빛 전망은 다분히 과장돼 있다. 많이 빠졌으니 오를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에 의존할 뿐 미국 금융시장의 불안은 간과되고 있다. 시장의 가격 결정 원리를 신봉하는 경제지들이 메릴린치를 비롯해 세계적인 투자은행들 지분이 헐값에 쏟아져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를 돌아보지 않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언론은 그동안 해외 국부펀드의 움직임을 소개하며 KIC에 좀 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투자에 나설 것을 주문해 왔다.
매일경제는 12월26일 <중국 CIC 뜀박질 하는데 한국 KIC 게걸음 왜?>에서 “국가 별로 국부창출 경쟁이 한치앞도 내다보기 어려울만큼 치열한 이때 지금 속도로는 경쟁에서 낙오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동아일보도 같은 날 <한국 국부펀드 "족쇄를 풀어다오">에서 “미국과 유럽 금융기관들의 위기는 한국의 절호의 투자 기회인데 손을 놓고 있다”면서 재정경제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 “한국이 잘못된 규정 때문에 중요한 기회를 흘려보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선일보도 11일 <한국 투자은행 키울 100년만의 기회 놓치고 있다>에서 윤영각 삼정KPMG 대표 등의 말을 인용, “지금부터 투자은행을 키우려면 시간이 무한정 걸리지만 세계적 투자은행과 제휴하면 시간을 대폭 줄일 수 있다”면서 “세계적 투자은행과 전략적 제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KIC의 메릴린치 투자는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서브프라임 사태 덕분에 가격이 많이 낮아진 것도 사실이고 장기 투자의 매력도 있다. 포트폴리오 배분 차원에서 천문학적인 규모의 외환보유액 가운데 일부는 공격적인 투자를 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짚고 넘어갈 부분은 우리 모두가 이제 메릴린치 또는 미국 월스트리트와 운명을 같이 하게 됐다는 사실이다. 국민들의 세금을 쏟아부어 신자유주의 금융 세계화의 수익률 게임에 뛰어든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