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 사회의 법적 정의가 땅에 떨어졌다. 법원은 16일 이건희 삼성그룹 전 회장의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증여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고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 헐값 발행 혐의에 대해서는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면소 판결했다. 법원은 조세포탈 등 일부 혐의만 유죄로 인정했다. 이 전 회장을 비롯해 8명의 피고 전원이 무죄나 면소,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궤변으로 가득찬 이날 법원 판결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이 판결이 우리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과 모순, 그 초라한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1. 456억원 조세 포탈하고도 집행유예? 이게 말이 되나.

법원이 인정한 이 전 회장의 조세포탈 규모는 무려 456억6178만9308원에 이른다. 다른 혐의들이 모두 무죄라고 해도 일단 이것만으로도 이 전 회장은 중범죄인이다. 특정경제가중처벌법에 따르면 탈루 규모가 연간 10억원이 넘으면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게 되고 3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게 되면 집행유예가 불가능하다. 이 전 회장의 경우는 당연히 5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재판부는 작량감경을 통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이 사건의 불법의 정도가 징역형의 실형을 선고할 정도로 중하다고 볼 수 없는 사안”이라는 이유에서였다.

2. 경영권 편법승계, 절차 제대로 밟았으니 문제 없다고?

법원이 에버랜드 경영권 편법 승계가 무죄라고 판단한 근거는 기존 주주들에게도 전환사채를 인수할 권리가 주어졌다는 이유에서다. 법원은 “이사회 결의 및 주주통지 절차 등 흠결이 일부 있다고 볼 여지가 있으나 실질적인 인수권을 부여한 것으로 볼 수 없을 정도가 아니라고 인정된다”고 밝혔다. 이게 무슨 말일까.

“부여한 것으로 볼 수 없을 정도가 아니다”라는 표현은 ‘부여했다’는 표현과 분명히 다른 의미다. 법원은 일단 형식적으로나마 기존 주주들에게 인수권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주주들이 실권할 것을 미리 알고서 이 같은 절차를 진행했다고 해도 이를 주주배정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는 이상한 논리를 펴고 있다.

법원이 밝혔듯이 이 사건의 쟁점은 전환사채가 3자 배정 방식으로 발행돼 특정인에게 이익을 몰아주려는 의도가 있었느냐다. 그런데 법원은 일부 흠결이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형식적이나마 절차를 거쳤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애매모호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법원은 에버랜드의 주주였던 계열사들이 모두 이 전 회장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이사회 결의를 거쳤다고 한들 다분히 형식적인 절차였을 뿐 계열사 경영진들은 이 전 회장의 지시를 거부할 아무런 권한도 없었다.

3. 아들에게 넘긴 회사, 왜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나.

그렇다면 에버랜드 사건은 누구에게 책임이 있을까. 여러 정황을 종합하면 에버랜드 경영진은 비서실의 지시를 받아 전환사채를 이재용 전무에게 넘겼고 에버랜드의 주요 주주였던 삼성물산 등 계열사들은 이를 방관했을 개연성이 크다. 이 과정에서 이 전무는 삼성그룹 전체를 지배할 수 있게 됐고 계열사들은 그만큼 손실을 봤다.

법원은 “설령 그것이 비서실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할지라도”라는 전제를 달았으면서도 “기존 주주들이 인수권을 부여받고도 실권한 이상 에버랜드 지배구조 변경 내지 기존 주주의 주식가치 하락이라는 결과는 스스로 용인한 것으로서 그 주주의 손해를 에버랜드에 대한 배임죄로 의율하기 어렵다”는 기상천외한 결론을 내렸다.

법원의 논리는 ‘이재용 전무에게 이익을 넘겨주는 과정에서 증여세를 포탈한 혐의를 적용할 수 있겠지만 이는 검찰의 공소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또 기존 주주들이 입은 손해 역시 이들이 스스로 결정한 것이기 때문에 문제될 게 없다는 것이다. 설령 이들이 비서실의 지시에 따랐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 전 회장과 비서실에는 책임이 없을까. 이들에게는 삼성물산 등 계열사들에 손해를 떠넘긴 혐의가 인정된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를 “해당 법인의 계열사의 배임행위를 도운 것으로 볼 여지도 있다”면서도 역시 “해당 법인과 관련된 것이므로 이 사건 공소와는 동일성이 없다”는 이유로 애초에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논점을 특검의 공소 부실로 돌려버린 셈이다.

4. 헐값에 넘긴 비상장 주식, 얼마나 헐값인지 입증 못하면 무죄?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 헐값 매각과 관련해서도 법원은 특검에 책임을 떠넘겼다. 관건은 당시 5만5천원에 거래됐던 삼성SDS의 신주인수권부사채를 7150원에 이재용 전무 등에게 넘긴 것이 과연 적정했느냐다. 비상장 회사인 삼성SDS의 주식가치 산정방식은 여전히 논란거리다. 법원은 적정가치를 8885원으로 산정했다.

법원은 “직전 거래가격이 5만5천원 상당인 사실은 인정된다”면서도 “유통량이 적고 거래가격의 왜곡 가능성이 제기됐다”고 지적했다. “형사재판에서는 행정소송과 달리 입증책임이 검사에게 있고 입증의 정도도 합리적인 의심을 배제할 정도여야 한다”면서 “이 가격이 삼성SDS 주식의 객관적인 교환가치를 반영한다는 특검의 입증이 부족하다”고 강조했다.

결국 법원은 이 사건을 공소시효가 지났다고 판단하고 모두 면소 판결했다.

물론 범죄 사실을 입증하는 것은 검찰의 책임이다. 그러나 법원은 충분한 근거가 제시됐는데도 일방적으로 삼성의 주장을 수용했다는 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입증의 책임은 검찰의 몫이지만 최종 판단의 책임은 법원의 몫이다.

5. 세금 안 내도 ‘부정한 적극적 행위’ 없으면 무죄?

조세포털 규모에 대해서도 논란의 여지가 많다. 이건희 전 회장은 1987년 고 이병철 전 회장의 삼성생명 등 지분을 차명으로 상속받아 1998년 그 가운데 일부를 자신의 명의로 변경했지만 나머지 4조5천억원 상당을 차명으로 보유해왔다. 이 전 회장은 이 차명재산을 이용해 삼성 계열사 주식을 사고 팔아 5643억원의 차익을 챙기고 1128억원의 양도소득세를 포탈한 혐의를 받아왔다.

그런데 법원은 1998년 이전의 차명재산 거래의 경우 “주식의 양도와 양도소득세의 미신고라는 행위만 있을 뿐 위계나 기타 부정한 적극적인 행위라고 볼만한 증거가 없고 취득 당시에는 양도소득세를 납부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질 수 없었으므로 사기 및 기타 부정한 행위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양도소득세 과세규정이 신설된 것이 1998년 12월이라는 이유에서다.

법원은 또 1999년 이후 거래의 경우도 “양도행위가 양도차익을 목적으로 한 경우가 아니라고 보인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다만 “다수의 차명계좌 이용과 계좌사이의 연결을 차단하려는 현금 입출금 거래 등을 종합하면 사기 및 기타 부정한 행위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사실상 법원이 유일하게 유죄를 인정한 부분이다.

법원은 “법정형이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포탈세액의 2배 이상 5배 이하의 벌금을 병과하는 중한 범죄”라면서도 “(이 전 회장이) 증권거래법이 금지하는 내부정보 이용 등 계열사 주식의 매매를 통해 재산증식을 꾀하려는 부정한 행위가 없었다”는 이유로 “행위 불법의 정도라는 측면에서 중한 범죄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또 “포탈액수가 466억원에 이르는 점에서 결과불법의 정도가 매우 중하다”면서도 “양도소득이 크게 발생한 이유는 삼성전자의 주가가 크게 상승했고 차명계좌에 주식을 장기보유했기 때문”이라고 이 전 회장을 대변하고 나선다. 또 “지난 6월 체납한 양도소득세를 납부했고 증여세도 액수가 확정되면 바로 납부할 것을 다짐하고 있어 불법의 일정 부분이 회복됐다”고도 평가했다.

법원의 판결은 모순투성이다. 뒤늦게 세금을 냈다고 해서 작량감경을 받을 수 있다면 누가 성실히 세금을 납부하려고 할까. 차명으로 자산을 보유하고 세금을 포탈했는데 부정한 적극적인 행위가 아니라고 판단하는 근거는 또 무엇일까. 법원은 심지어 포탈액수가 큰 이유가 주가 상승 때문이라는 친절한 해설까지 곁들였다.

6. 징역 5년인데 2년반씩 쪼개서 각각 집행유예?

법 원은 결국 “모두 종합해 보면 조세포탈의 죄질을 비롯한 이 사건의 불법의 정도가 징역형의 실형을 선고할 정도로 중하다고 볼 수 없는 사안이므로 작량감경을 거쳐 징역형의 집행을 유예함이 옳다고 판단된다”고 선고했다. 466억원의 조세를 포탈한 범죄가 징역형의 실형을 선고할 정도로 무겁지 않다면 도대체 누가 징역형을 받는다는 말일까.

이학수 전 부회장의 경우도 이해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이 전 부회장은 2003년과 2004년의 조세포탈에 대해 징역 2년6개월과 벌금 140억원, 2005년과 2006년, 2007년의 조세포탈에 대해서는 징역 2년6개월과 벌금 600억원이 각각 선고됐다. 징역 3년 이상이면 집행유예가 안 된다는 점을 감안해 재판부는 시기별로 나눠 2년6개월씩 징역형에 각각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물론 2004년에 다른 확정판결이 있어 형을 나눌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 있었지만 집행유예를 주기 위한 편법인 것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이건희 전 회장이 이학수 전 부회장보다 더 적은 형량을 선고받았다는 사실도 이해하기 어렵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건희 전 회장은) 양도소득의 귀속주체로서 조세포탈의 수익자일 뿐만 아니라 최상위 지휘감독자라는 점에서 다른 피고인들보다 책임이 더 무겁다”고 밝힌 것과도 배치되는 부분이다.

7. 면죄부의 원 저작자, 특검의 항소는 얼마나 진정성이 있을까.

한편 조준웅 특검은 “법원이 아예 무죄를 전제로 선고를 내렸다”며 즉각 항소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언뜻 특검과 법원이 맞서는 양상으로 비춰졌지만 특검은 사실 일찌감치 이 전 회장 등에게 면죄부를 준 바 있다.

특 검은 지난 4월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E삼성과 서울통신기술 등 이재용 전무의 경영권 불법 승계 의혹을 대부분 불기소 처분했다. 비자금 조성 의혹은 대부분 계열사 경영진의 책임으로 돌렸고 논란이 됐던 고가 미술품 구입이나 분식회계 의혹에 대해서도 근거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차명계좌와 관련해서도 양도소득세 포탈과 증권거래법 위반 혐의를 인정했지만 차명계좌가 비자금이 아니라 이 전 회장의 차명자산이라는 삼성의 해명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구조본이 에버랜드와 삼성SDS 사건 등에 조직적으로 개입한 사실을 밝혀냈지만 이는 이미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데 그친 것이다.

결국 특검이 새로 밝혀낸 부분은 조세포탈 혐의 밖에 없는데 이 역시 삼성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이 전 회장은 특검 덕분에 분식회계를 통해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을 털어내고 당당히 세금을 내고 차명자산을 실명으로 전환시킬 수 있게 됐다. 법원은 이에 대해 기꺼이 “징역형의 실형을 선고할 만큼 죄질이 무겁지 않다”고 화답했다.

항소심과 항고심을 지켜봐야겠지만 결국 이로써 이 전 회장 일가는 경영권 불법승계를 둘러싼 논란을 종식시키고 후계구도를 뿌리내릴 수 있게 됐다. 그 일등공신이 특검과 법원이라는 사실을 이번 재판결과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특검이 법원의 판결에 분개하는 제스춰를 보이는 것은 참으로 면구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다.

Similar Posts

2 Comments

  1. 수 억원을 운영비로 쓴 특검은 결국 또 다시 국민들의 아까운 세금만 낭비를 했습니다. 경제정의가 실현되지 않고 이러한 작태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한, 선진화 된 한국의 모습은 마피아 같은 부패와 무질서로 얼룩진 혼돈의 자화상 이겠지요.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