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1989년의 일이다. 그해 5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결성됐다. 아이들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무슨 노동조합? 선생님들이 수업 팽개치고 월급 올려달라고 파업하는 꼴 보게 생겼네? 그때 사람들 인식이 딱 그랬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우리 학교에서도 여러명의 선생님들이 전교조에 가입했다. 선생님들은 패가 갈렸고 아이들은 수업이 끝나고 따로 모였다. 선생님은 노동자인가? 아닌가? 그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선생님들이 월급 올려받는 것을 넘어 다른 무엇을 주장하고 있다는데 관심이 갔다.

나는 선생님들을 지지하는 아이들 모임에 가입했고 그날 밤 늦게까지 남아 대자보를 쓰고 골판지 등을 잘라 피켓을 만들었다. 휴대전화도 무선호출기도 없던 시절이라 자정이 넘어 학교까지 찾아오신 어머니께 끌려가면서 호되게 야단을 맞았던 기억도 난다.

학교는 전교조를 탈퇴하지 않을 경우 퇴직 처분을 하겠다고 했고 상당수 선생님들이 탈퇴했다. 전교조를 탈퇴하지 않으려면 교사 자격을 박탈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도 가끔 생각하곤 하지만 나라면 명분을 지키기 위해 일자리를 버려야 하는 그런 상황에서 계속 버틸 수 있었을까.

한 선생님은 수업에 들어와 결국 눈물을 보이고야 말았다. “나를 비겁하다고 욕해도 좋다. 그렇지만 나는 용기가 없다. 부끄럽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그 선생님은 전교조를 탈퇴했고 살아남았다. 그리고 7명의 선생님들이 끝까지 버티다가 결국 학교를 떠났다.

여름방학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학생회와 별개로 비상대책위원회가 꾸려졌고 전교생이 수업 거부에 들어갔다. 교실 문을 걸어잠그고 선생님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담임 선생님은 문 앞에 앉은 아이 이름을 부르며 문을 두드렸고 그 애는 얼굴을 책상 위에 파묻고 귀를 막았다.

7명이나 해직된 학교는 우리 학교가 유일했다. 우리는 강당에 모여 구호를 외치다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노래를 부르면서 이웃 학교까지 걸어가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교문을 막고 선 선생님들이나 전투경찰들과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대학생들과 연대 투쟁도 벌였다. 5월 광장 가득히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 어우러졌고 둥둥 북소리가 가슴을 울렸다. 거리로 나가 최루탄을 뒤집어 쓰면서 보도블럭 조각을 던지기도 했다. 민중가요도 그때 처음 배웠다.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도 그때 처음 들었다.

나는 이름도 거창한 맹호대로 선봉에 섰지만 눈 앞에서 최루탄이 터지고 눈물 콧물이 쏟아지고 백골단들이 몰려와 두둘겨 패기 시작하자 허겁지겁 도망치기에 바빴다. 같이 도망치던 친구는 붙잡혀서 이틀 뒤에야 훈방됐고 그 뒤에도 일주일에 한번씩 불려가 반성문을 써야했다.

출근 투쟁을 벌이는 선생님들을 닫힌 교문 안쪽에서 만날 때면 다들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그때 우리는 옳은 것이 늘 이기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 절실히 깨달았다. 넉달 가까이 수업을 받지 못했지만 훨씬 더 많은 걸 그때 길 위에서 우리는 배웠다.

가을이 되자 다시 수업이 시작됐고 7명의 선생님들은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시위를 주동했다는 혐의로 구속된 3학년 선배는 그 해가 다 지나도록 감옥에서 보냈고 결국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의 판결을 받았다. 그 선배는 나중에 검정고시를 치르고 대학에 입학했고 전국대학생협의회(전대협) 의장이 됐다.

그리고 거의 20년이 지났다. 숱한 희생을 치르면서도 전교조는 와해되지 않았고 교육현실은 오히려 더욱 열악해졌다. 그때 그 선생님들 만큼의 나이가 된 지금, 당신들은 그동안 무엇을 했느냐고 묻고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들을 지지한다. 그들의 용기와 바른 생각을 여전히 지지한다.

(1991년과 1992년에 대해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그건 다음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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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Comment

  1. 전 그때 너무 어려서 잘 기억이 안나지만, 말씀을 들어보니 그때만큼은 아니더라도 지금도 전교조에 대한 편견이 많은것 같습니다. 때문에 7명 징계교사를 더욱 방어하고 함께 싸워야 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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