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애플 아이팟이 처음 나오기 훨씬 전에 나는 하드디스크형 MP3플레이어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내고 회사를 그만두고 벤처 창업을 할까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포기한 게 잘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암튼 그 무렵 MP3플레이어는 20만원이 훌쩍 넘었고 저장용량은 32MB나 64MB부터 있었고 많아 봐야 128MB나 256MB가 고작이었다. 노래 2, 30개 담으면 끝.
물론 하드디스크도 용량이 신통찮아서 512MB나 1GB 정도였고 당연히 3.5인치였다. 이제 막 1GB 이상 하드디스크가 나오던 참이라 안 쓰게 된 512MB 미만의 하드디스크를 떼다가 MP3플레이어로 만들면 어떻겠느냐는 아이디어였다. 부품이라고 해봐야 별거 없고 하드디스크를 뺀 단가는 5만원 미만으로 하고 외장형 하드디스크로 쓸 수도 있고 간단히 케이블로 연결해서 MP3 파일을 그냥 옮겨 담기만 하는 방식으로.
휴대용이라고 하기에는 약간 부담스러운 크기지만 일단 가격이 반의 반 밖에 안 되면서 용량은 훨씬 크고 외장형 하드디스크로도 쓸 수 있고. 그리고 휴대용이 시장이 안 되면 아예 탁상용으로 만들어서 좀 더 비싸게 파는 방법도 있었다. 나름 참신한 아이디어였지만 주변에서 모두가 말려서 결국 그만두게 됐다. 그리고 2년쯤 뒤에 아이팟이 나왔고 나는 그때 산 아이팟을 아직도 쓰고 있다.
탁상용 MP3플레이어 시장은 아직도 있다고 생각한다. 좀 더 세련된 디자인에 음질을 강화하고 시원시원한 디스플레이와 인터페이스를 갖추면 꽤나 팔리지 않을까. 커피숍이나 호프집 같은데 보면 카운터 옆에 PC를 놓고 앰프에 연결해 MP3 파일을 재생하는 그런 곳도 많지 않은가. 요즘은 하드디스크도 워낙 싸니까 음질을 강화해도 20만원 초반이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데. 까만 색의 납작한 형태의 디자인이 좋을 것 같다.
요즘 하드디스크는 정말 싸다. 회사마다 다르지만 320GB가 7만원 수준이고 500GB면 9만원 수준. 1TB면 16만원 정도다. 가격이 계속 낮아지는 추세라 머지않아 1TB도 10만원 안쪽으로 떨어지지 않을까 싶다.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다. 내 경우 회사에서 쓰는 노트북에는 30GB가 하드디스크가 하나 장착돼 있고 집에서 쓰는 PC에는 모두 4개의 하드디스크가 있는데 다 합쳐도 30GB가 채 되지 않는다.
하드디스크에는 아픈 기억이 많다. 전에 쓰던 노트북은 하드디스크가 5GB 밖에 안 돼서 자료 백업을 위해 외장형 하드디스크를 샀는데 그때만 해도 하드디스크가 망가질 수 있다는 걸 잘 몰랐다. 기껏 모든 자료를 옮겨놨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인식이 안 된다니. 결국 데이터 복구 업체에 들고 가서 눈이 튀어나올 만큼 비싼 돈을 주고 살려야 했다. 그리고 나서 새로 산 외장형 하드디스크 역시 드르륵 소리를 몇 번 내더니 멈춰버린 상태다.
데이터 복구 업체들은 데이터 용량에 따라 돈을 받는데 100GB라면 20만원 이상을 줘야 한다. 안전을 위해서라면 외장형 하드디스크 역시 또 백업을 해둬야 한다는데 그렇게까지 할 사람이 있을까. 일단 마음 먹은 건 두 번 다시 삼성전자 하드디스크는 사지 않는다는 거다. 애프터서비스는 잘 해준다지만 애초에 애프터서비스 받을 일이 없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이건 뭐 하나마나 한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