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보험에 가입돼 있어도 교통사고로 중상해를 입히면 형사처벌을 받게 된다. 26일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는 재판관 9명 가운데 7명의 찬성으로 교통사고 처리 특례법이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지금까지는 음주운전이나 뺑소니, 중앙선 침범 등 10대 과실이 아니라면 형사처벌에서 면제돼 왔다.
헌재는 결정문에서 “종합보험에 가입한 운전자는 큰 사고를 내도 아예 기소하지 못하게 한 조항은 평등권과 재판절차 진술권을 침해한다”고 밝혔다. 헌재의 이번 결정은 그동안 아무리 큰 사고를 내도 보험회사에 맡겨두고 나몰라라 하던 관행을 바꾸게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운전자들의 경각심을 일깨워 교통사고를 줄이는데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27일 대부분의 언론이 이 소식을 빼놓지 않고 다뤘지만 관점은 조금씩 다르다. 중앙일보와 동아일보, 국민일보 등이 비중있게 다루면서 다양한 시각과 전망을 소개한 반면 다른 신문은 단순히 헌재 결정을 인용하는데 그치거나 경찰 업무가 가중된다거나 시행 초기에 혼란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정도를 언급하는데 그쳤다.
앞으로는 사고를 내면 크든 작든 경찰의 조사를 받고 과실이 운전자에게 있거나 피해자에게 있거나 상관없이 일단 중상해로 판명되면 무조건 기소가 된다. 피해자의 과실이 크면 기소유예나 약식기소의 가벼운 처벌을 받겠지만 만약 피해자와 합의가 되지 않으면 최대 5년 이하의 금고,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한겨레는 손해보험협회를 인용해 중상해의 기준은 전치 10주 정도가 될 거라고 전하고 있다. 문제는 피해자와 원만한 합의가 안 될 경우다. 합의를 빌미로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일어날 수도 있다. 금전적으로 합의를 보기 어려운 저소득 계층의 경우 전과자가 될 가능성이 더 크다는 이야기다.
이번 헌재 결정은 보행자와 교통사고 피해자들의 권리가 강화된다는 점에서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생계형 운전자들의 부담이 더욱 커졌고 전과자가 양산될 우려도 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막대한 합의금을 물어야 하기 때문에 이를 이용한 가짜 진단서를 떼는 보험 사기나 자해공갈단 등의 범죄가 만연할 가능성도 있다.
이번 결정을 가장 환영하는 쪽은 역시 보험사들이다. 중상해 사고의 경우 보험금 지급과 별개로 막대한 합의금을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운전자들이 좀 더 경각심을 갖게 될 것이고 대형 교통사고가 크게 줄어들어 수익성이 개선될 것으로 기대된다. 또 향후 합의금까지 부담해주는 특약 등을 신설해서 보험료를 높여 받을 수도 있게 될 것으로 보인다.
언론 보도에서 간과되고 있는 부분은 단순히 민사 배상에 형사 처벌을 추가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이롱 환자가 문제의 한 축이라면 다른 한 축에는 진짜 환자들까지 나이롱 환자 취급을 받게 되는 문제가 있었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평생을 고생하면서도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핵심은 피해자가 온전한 치료와 보상을 받는 것인데 지금까지는 둘 다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헌재 결정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보험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니 합의금에 목을 매게 될 텐데 결국 충분한 합의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으면 전과자가 될 수밖에 없다. 운전자들은 누구나 잠재적인 범죄자인 셈이지만 경제적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예외다.
중상해 사고를 낸 운전자들을 형사 처벌 한다고 해도 이 딜레마는 해결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운전자 과실 여부를 떠나 합의금을 낼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빠져 나갈 것이고 능력이 안 되는 사람들은 벌금을 물거나 징역형을 살아야 한다. 피해자들은 여전히 보험사들과 싸워야 하고 이제는 더 많은 합의금을 받기 위해 운전자와도 신경전을 벌여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건강보험과 자동차보험을 통합하고 재원을 확충해 모든 국민들에게 100% 무상 의료를 도입하는 대안도 고민해 볼 수 있다. 치료와 손해배상을 구분해서 자동차 운전자들이 건강보험 보험료를 추가 부담하도록 하고 모든 교통사고 피해자들이 필요한 만큼 충분히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하자는 이야기다.
종합보험 하나로 모든 책임에서 벗어나도록 한 현행 제도도 문제가 많지만 단순히 형사 처벌을 추가하는 것으로 피해자들에게 충분한 보상이 된다고 볼 수는 없다. 고급 외제 승용차에 치인 사람은 합의금을 받겠지만 채소장수 트럭에 치인 사람은 못 받게 될 수도 있다. 부자들은 돈으로 해결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몸으로 떼워야 한다.
운전자들의 책임을 강화하고 경각심을 일깨워 교통사고를 줄이는 것도 필요하지만 결국 근본적인 해법은 공적 의료와 공적 보험의 확대 밖에 없다. 누구나 몸이 불편할 때 필요한만큼 치료를 받고 그 비용을 사회 구성원들 전체가 나눠서 부담하는 방식, 운전자들이 추가로 그 비용을 부담하고 합당한 책임을 지는 방식 말이다.
가해자의 경제여건을 고려하여 합의금의 최대한도를 단계별로 적용하는 방안도 필요할 것 같아요.
오늘 아침에 뉴스를 보니 대법원에서 일단 관련 사건들을 모두 유보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