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빈티지 키보드 가운데 특히 모델M-1391401을 선호합니다. 회사에서는 소리가 너무 커서 눈치가 보이기도 하고 노트북에 연결해서 쓰기 때문에 토프레 해피해킹 프로를 들고 다니지만 집에서는 모델M 스페이스 세이버를 메인으로 쓰고 있습니다. 스트로크 압력이 높아서 오래 타이핑을 하다 보면 손가락이 뻐근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명확한 구분감은 모델M을 따를만한 키보드가 없다고 생각했죠. 맑게 울리는 스프링의 공명 또한 모델M의 매력입니다.
참고 : IBM 모델M-1391401의 추억. (이정환닷컴)
참고 : 극단적인 미니멀리즘, 토프레 해피해킹 프로패셔널. (이정환닷컴)
그런데 어제 우연히 알프스 청축 키보드를 두들겨 봤는데 모델M 보다 구분감이 더 명확한 것 같습니다. 훨씬 가볍고요. 손가락에 힘도 거의 들어가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타이핑을 할 때 찰칵찰칵하고 기분 좋은 클릭 소리가 리듬감을 살려줍니다. 체리 청축이 짤깍짤깍 또는 재잘재잘하고 신경질적인 금속성 소음을 낸다면 알프스 청축은 좀 더 부드러우면서도 상쾌한 느낌을 줍니다. 구분감도 체리 청축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입니다. 어느 시점에 입력이 되는지 직관적으로 알게 되죠.
모델M과 번갈아 가면서 타이핑을 해보면 모델M은 상대적으로 무거우면서도 스트로크 깊이가 얕아서 답답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알프스 청축은 입력과 동시에 시원시원하게 바닥을 탁 때리고 나오는데 모델M은 스프링의 압력 때문이겠지만 바닥 치는 맛이 덜한 것 같습니다. 각각 장단점이 있지만 알프스 청축이 훨씬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제가 만져본 키보드 가운데 단연 최고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알프스 키보드에 대한 기억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낡아빠진 애플 확장을 두어개 잡았다가 후회 만점이었던 기억이 좀 있고, 애플 어드를 잠깐 만져봤다가 극악스러운 키감에 내던져 버렸고요. 이베이에서 델 101W 흑축 키보드를 10만원 가까이 주고 들여왔다가 속이 쓰라렸던 적도 있습니다. 오래돼서 스위치가 마모된데다 알프스 중에서도 인기가 없는 모델이었죠. 체리 키보드는 거의 마모가 되지 않는데 알프스 키보드는 사용량에 따라 감도가 달라지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알프스 키보드는 완전히 단종이 됐습니다. 간혹 이베이 같은데서 20년도 더 된 키보드가 매물로 나오곤 하지만 스위치 상태가 좋은 걸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최고의 키보드지만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그나마 타이핑을 할 때마다 수명이 줄어들기 때문에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 키보드라고 누군가가 그러던데요. 5천원짜리 중국산 멤브레인 키보드가 넘쳐나고 돈만 주면 얼마든지 예쁜 키보드를 살 수 있지만 이런 최고의 키보드는 이제 영원히 구경도 하기 어려울 겁니다.
(빈티지 키보드는 지나간 1980년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킵니다. 디스켓을 갈아끼우면서 DOS 명령어를 입력하던 그 시절 말이죠. 그렇지만 좋은 키보드가 있다고 좋은 글을 쓰는 건 아닙니다. 그걸 지난 1년 동안 체감했습니다.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마법의 키보드? 그런 건 세상에 없습니다. 다만 좋은 키보드는 글 쓰는 재미를 배가시켜주는 것 같습니다. 맘 잡고 틀어박혀 3박4일로 원고를 써야 할 때 알프스 청축 같은 키보드가 있으면 정말 신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