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날수록 물건의 가치는 떨어진다. 그런데 돈은 어떤가. 이자가 붙어서 계속 불어난다. 돈이란 건 애초에 물건과 물건의 교환을 쉽게 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돈이 돈을 낳고 있다. 2005년 기준으로 세계적으로 국내총생산(GDP) 합계는 30조달러인데 유통되고 있는 돈은 300조달러나 된다. 이게 의미하는 게 뭘까. 거래될 수 있는 재화와 서비스의 총량보다 10배나 많은 돈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이야기다.
다나카 유 일본 미래은행 이사장 등은 최근 번역·출간된 ‘굿머니’라는 책에서 “자연은 이자를 낳지 않는다”는 화두를 던진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생산성과 효율성이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자원은 유한하고 성장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금융투자의 세계에서는 복리 이상의 수익률을 요구한다. 올해 3%의 이익을 냈다면 내년에는 그 이상의 이익을 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가가 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의 지은이들은 모두 ‘에이시드 재팬 에코저금 프로젝트’의 활동가들인데 에이시드(A SEED)란 ‘Action for Solidarity, Equility, Environment and Development(연대와 평등, 환경, 개발을 위한 행동)’의 줄임말이다. 이들은 “이자와 배당의 요구가 작은 사회, 가능한 한 단리로 돌아가는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구체적인 실천 대안으로 “지역에서 얻은 이익을 지역으로 순환시키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들은 일본에서 미래은행을 비롯해 여러 NPO(비영리기구) 은행을 운영하고 있다. 일반 금융기관에서 대출을 받기 어려운 시민단체나 지역의 커뮤니티 비즈니스에 1~5%의 낮은 금리로 대출을 해준다. 이 은행들은 어디에 얼마를 대출해줬는지를 출자자들에게 모두 공개한다. 이 은행의 출자자들은 이자 수익을 얻기 보다는 좀 더 나은 곳에 자신들의 돈이 쓰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다. 이 은행들은 지역의 돈은 지역에서 돌게 한다는 원칙을 지킨다.
많은 사람들이 이자를 많이 주는 예금, 더 많은 수익을 내는 펀드를 찾아 옮겨 다닌다. 그런데 사실 그 돈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를 따져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수익도 좋지만 내 돈의 일부가 미국 국채를 사는데 들어가고 그 돈이 다시 전쟁무기를 사는데 흘러들어갈 수도 있다. 일본의 경우 은행에 30만엔을 예금할 경우 이 가운데 0.33%인 1천엔이 전쟁물자로 활용된다는 통계도 나온 바 있다.
지역의 돈이 중앙으로 빠져나가 지역을 황폐화시키는 경우도 많다. 엉뚱하게도 건설회사들 배만 불리는 대규모 토목사업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값싼 노동력을 찾아 해외로 빠져나가는 다국적 기업이나 박리다매의 물량공세를 퍼붓는 대형 할인점 역시 지역 경제를 무너뜨린다. 이 책의 지은이들은 “어디에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는지도 모르는 돈의 세계화가 아니라 우리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돈의 지역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마이크로크레디트에 대한 조심스러운 접근도 주목할 만하다. 이 책의 지은이들은 “마이크로크레디트란 어느 개인이 부자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생산자였던 마을 사람들이 어느 순간 소비자로 둔갑해서 소비 중심 사회로 변질될 가능성도 경계한다. 그래서 “돈의 힘의 휘둘리지 않도록 사회의 근본을 바로 세우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지역통화도 그 대안이 될 수 있다. 배추 한 포기를 살 수 있는 지역통화는 물가가 오르거나 말거나 환율이 오르거나 말거나 균일한 가치를 갖는다. 물건과 돈이 1 대 1로 대응하는 지역통화의 비중이 유의미할 정도로 늘어나면 금융회사들이 신용창출이라는 마술을 부리기도 어려워진다. 무엇보다도 지역통화는 지역 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지역 내 경제 선순환이 가능하도록 돕는 효과가 있다.
1930년대 세계 대공황 시절, 오스트리아 베르글이라는 마을에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떨어지는 자유화폐를 도입한 바 있다. 1개월 마다 액면가의 1%를 내고 도장을 찍어야 사용할 수 있는데 이 때문에 돈의 유통속도가 빨라졌다. 10실링의 화폐가 한달 사이에 12번이나 유통되면서 실업자가 크게 줄어들고 상점도 크게 번성했다. 이자가 돈의 순환을 막는다는 실비오 게젤의 철학을 구현해 성공한 사례다.
이 책의 지은이들은 “경제와 금융시스템에서 의식적으로 벗어날 필요가 있다”면서 “일터를 대기업에만 의족하지 않고 꼭 필요한 물품과 서비스만 생산·제공하자”고 제안한다. 금융을 이자의 산실이 아닌 경제의 윤활유로써 기능하도록 바꿔나가자는 이야기다. 자급자족적 경제,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계하는 물물교환이 가능한 지역장터, 사회책임투자와 사회책임소비 등을 그 대안으로 제시한다.
노동시간의 단축도 중요한 화두다. 일본의 경우 1975년에서 1995년 사이 노동생산성 향상의 효과 가운데 4분의 1이 여가시간의 연장으로, 나머지 4분의 3은 소비의 확대로 이어졌다. 이를테면 1970년에 2천시간 일하고 연봉 400만엔을 받는 사람이 2005년에는 1600시간 일하고 800만엔을 받게 됐다고 가정해 보자. 노동시간은 20% 줄었는데 수입은 2배가 됐다. 이렇게 늘어난 수입의 대부분이 서비스와 에너지 소비에 들어갔다.
이들은 묻는다. 노동생산성이 늘어났는데 왜 우리는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가. 이들은 만약 우리가 소비를 줄인다면 훨씬 더 적은 돈으로 훨씬 더 많은 여가를 누리면서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1970년과 비슷한 420만엔 정도의 연봉을 받으면서 하루 3시간씩만 일하거나 아예 8시간씩 1주일에 이틀만 일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덜 일하는 대신 덜 벌고 더 많이 놀자는 이야기다.
이 책의 결론은 욕망을 자제할 것, 그리고 욕망을 자제하는 시스템을 만들자는 것으로 요약된다. ‘굿 감세와 배드 과세’라는 조세원칙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좋은 상품이나 활동에는 세금을 낮춰주거나 면제 또는 보조금까지 얹어주고 나쁜 상품이나 활동에는 무거운 세금을 물리자는 이야기다. 인건비에 대한 세금을 낮추고 에너지의 사용을 늘려서 생산성 중시 사회에서 자원 효율성 중시 사회로 가자는 제안이다.
다나카 유는 “생활은 작은 범위 안에서 해 나가고 정보 교류는 세계 사람들과 해 나가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면서 “세계화 해야 할 것은 교류와 정보이지 경제일 필요는 없다”고 강조한다. 이 책에서 여러차례 인용된 ‘오래된 미래, 라다크에서 배운다’를 쓴 헬레나 니르베르 호지가 “우리의 행복한 미래는 지역 안에서 자급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대목이다.
“착한 돈이 세상을 바꾼다”는 구호는 너무 추상적이고 순진무구하게 들린다. 그러나 자본의 무한증식과 극단적인 양극화, 노동의 소외에 맞서는 유일한 대안으로 정치적으로 올바른 투자와 올바른 소비를 선택하는 것은 효과적인 전략이 될 수 있다. 공정무역과 마이크로크레디트, 지역화폐, 자급자족적 지역 경제 등은 결코 불가능한 꿈이 아니다. 불가능하지 않다는 걸 깨달을 때, 작은 실천의 힘을 의식할 때 변화는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