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사상 최대의 지진이 발생했던 지난 3월11일 오후 3시, 나는 하코다테에서 삿포로로 가는 기차 안에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별일 없이 돌아온 그 다음 주, 어머니가 찾아오셔서 고생했다며 10만원을 용돈으로 주셨다. 어디어디 다녀왔냐고 물으시길래 말씀드렸더니 어머니는 역시 하코다테와 ‘양치는 언덕’을 기억하고 계셨다.
대학 시절, 방학 때 집에 내려가서 어머니가 읽고 계시던 ‘양치는 언덕’을 들춰보다가 미우라 아야코를 알게 됐다. 어딘가 통속적인 주말 연속극 같은 스토리지만 미우라 아야코의 소설에는 운명과 구원의 메시지가 담겨있다. 사실은 어쩌다가 우연히 펼쳐 읽은 페이지가 야한 장면이어서 호기심에 처음부터 읽게 됐던 것 같다.
홋카이도에 가면서 하코다테를 꼭 들러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 이 소설 때문이었다. 소설을 써보겠다고 깝죽거리던 시절부터 기자가 됐다고 거들먹거리던 시절에도 나는 늘 내가 어딘가 스기하라 료이치와 닮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켜 줄 히로노 나오미 같은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료이치는 화가가 꿈이지만 신문 기자로 일하고 있다. 나오미는 료이치와 그의 친구 다케야마 데쓰야에게 동시에 청혼을 받지만 료이치를 선택한다. 다케야마는 나오미의 고등학교 교사였다. 나오미는 순수하고 정열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료이치가 즉흥적이고 무책임한 사람이라는 걸 뒤늦게 알게 된다. 그리고 다케야마에게 마음이 기울기 시작한다.
나오미와 료이치의 동생 교코는 친구 사이다. 또 다른 친구 가와이 데루코의 아버지와 교코의 어머니는 불륜 관계다. 데루코는 나중에 나오미의 남편인 료이치와 불륜 관계를 맺게 된다. 한심한 줄거리 같지만 나오미의 상실감과 이를 지켜보는 다케야마의 쓸쓸함, 료이치의 죽음과 나오미가 결국 그를 용서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하다.
“천재는 인스피레이션으로 그리는 거야. 날마다 그릴 필요가 없어.” 나오미는 자유분방하면서도 예민하고 감수성이 넘치지만 재능을 아무렇게나 소진하는 료이치와 성실하고 따뜻한 다케야마 사이에서 갈등한다. 다케야마 역시 나오미를 갈망하고 나오미가 흔들리는 것도 알고 있지만 묵묵히 지켜볼 뿐이다.
료이치는 집으로 도망쳐 온 나오미를 찾아왔다가 각혈을 하고 드러눕게 된다. 나오미의 아버지는 목사다. 그 집에 머물면서 료이치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본다. “내가 제일 두려운 건 그림을 그릴 나 자신을 잃는 일이었어. 자아의 주장이 예술인 한, 자아에 철저한 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조르쥬 루오의 ‘예수 그리스도’를 보니 무언가 가슴에 부딪혀 오는 게 있더군. 아픔이라고 할까, 연민이라고 할까. 루오의 ‘그리스도’는…. 그걸 보고 있으면 어쩐지 깊은 위로를 느끼게 돼. 그렇다면 내가 그리는 그림은 뭘까. 초조해 하며 예민하게 곤두서 붓을 잡은 내가 대체 사람의 마음에 무엇을 호소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네.”
데루코와 마지막으로 만나기로 한 날, 료이치는 돌아와서 나오미에게 줄 선물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오미는 쌀쌀하게 외면한다. 료이치는 그날 저녁 데루코가 준 수면제를 탄 위스키를 마시고 돌아오던 길에 잠이 들어 얼어 죽는다. 료이치가 남긴 선물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와 그 밑에서 무릎을 꿇고 피를 뒤집어 쓰고 있는 한 남자, 바로 료이치의 그림이었다.
죽고 나서야 료이치의 그림은 제대로 된 평가를 받는다. 한 평론가는 “이런 천재를 미리 발견하지 못한 내가 미술 평론가라는 걸 얼마나 부끄럽게 생각했는지 모른다”고 말했고 한 신문에는 “그림은 기교나 인스피레이션에 의해 태어나는 게 아니라 깊은 영혼의 밑바닥에서 태어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는 평론이 실리기도 했다.
하코다테는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북쪽의 서늘한 바람,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모토마치 언덕, 어딘가 불쑥 떠나고 싶도록 방랑벽을 자극하는 가네모리 창고 지대, 펄쩍펄쩍 생명력이 넘쳐나는 아침 시장, 땡땡거리면서 골목골목을 비집고 들어가는 전차, 종착역에 있던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아늑한 족탕, 이국적인 파스텔 톤의 낮은 지붕의 집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