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정 민주노동당 의원이 17일 재정경제부 국정감사에서 공개한 삼성그룹 금융계열사 사장단 회의 문건은 그야말로 충격적이다.

이 문건은 삼성그룹이 은행을 소유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어떤 정책적 변화들이 필요한지 구체적인 로드맵을 담고 있다. 이 문건은 삼성그룹이 재경부와 금융감독원 등의 경제 관료들은 물론이고 학계와 연구기관, 언론 전반에 걸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제의 문건은 삼성전략기획실 직속 삼성금융연구소가 2005년 5월에 작성한 ‘삼성 금융계열사의 금융지주회사 전환 로드맵’이다. 이 문건은 금융사장단 회의에서 내부지침으로 채택한 문건으로 알려져 있다. 이 회의 이후 금산분리를 폐지하자는 논의는 실제로 이 문건의 시나리오대로 진행됐다.

아래는 삼성그룹이 학계와 연구기관을 동원, 어떻게 정부를 압박했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금산분리 과제를 2005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거론되도록 한다. 민감한 사안이므로 연구소가 직접 외부에 노출되기 보다는 외부 연구기관(서울대 기업경쟁력 연구센터)의 연구 과제로 다루도록 한다.”

“금융연구원 이건범 박사의 ‘금융지주회사법 개정법률안’ 관련 용역 보고서에 비은행 금융지주회사 내용이 포함되는 것을 1단계 목표로 한다”는 대목도 눈길을 끈다. 이 연구원은 삼성의 요구가 있었지만 보고서에 반영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한편 금융연구원 이병윤 연구원은 최근 <산업자본의 은행 소유 규제 완화는 필요한가>라는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기도 했다.

“더욱 현실적인 대안은 기존의 재벌들이 소유·지배구조를 개선하여 금융그룹과 일반기업그룹으로 그룹 내 기업들을 분할한 후 그 중 금융그룹이 은행을 인수하는 방안이다. 기존의 재벌가가 그룹내 모든 기업을 지배하려는 생각만 조금 바꾸면 금융그룹과 일반기업그룹으로 분리가 가능하고 분리된 금융그룹이 알짜 기업인 은행을 인수할 수 있을 것이다.”

문건은 산업자본의 은행 소유가 받아들여지기 쉽지 않다는 점을 감안해 중장기적 과제로 추진하되, 비은행 금융지주회사를 대안으로 제안하고 있다.

“금융지주회사 틀이 현행 수준에서 유지된다면 삼성그룹은 금융지주회사 요건에 적용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규제를 피하면서 현행 체제의 이점을 향유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삼 성생명이나 삼성증권 등 삼성그룹의 비은행 금융계열사를 동원, 측면에서 은행업 진출을 노리자는 전략인 셈이다. 비은행 금융기관의 은행업 진출을 위해 어슈어뱅킹이나 내로우뱅킹 등의 제도를 도입하자는 주장도 눈길을 끈다. 어슈어뱅킹과 내로우뱅킹 등의 대안은 2005년 11월 재경부 태스크포스와 금감원 등에서 긍정적으로 검토되기도 했다. 증권사에 지급결제 기능을 부여하도록 하는 자본시장통합법은 이미 국회를 통과한 상태다.

문건에는 또 비은행금융기관의 인터넷 뱅킹 진출을 위해 “외국계 자본의 국내 금융업 잠식의 부작용과 이에 대항할 수 있는 국내자본의 육성 필요성 강조해야 한다”는 문구도 들어있다.

실제로 윤증현 전 금융감독위원장은 “시중은행 7개 중에 외국인 지분이 50%를 넘지 않는 곳은 우리은행 단 한 곳”이고 “국내 자본이 역차별을 받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면서 금산분리 완화를 주장하기도 했다.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도 지난 5월 서울파이낸스포럼 초청 강연에서 “국내 자본에 대한 역차별이 심각한 만큼 이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면서 금산분리 완화를 주장했다.

이들과 삼성의 직접적인 유착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이런 주장의 발원지가 삼성이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정치권을 중심으로 금산분리 완화하자는 주장이 확산된 것도 이 문건의 작성 시기와 일치한다. 언론도 이 무렵부터 삼성의 주장을 확대 재생산해 왔다.

참고 : ‘삼성은행’ 바람잡기 하나… 돈 출신성분 묻지 말자는 언론. (이정환닷컴)
참고 : 말 안 되는 금산분리 폐지 논의, 지겹지도 않나. (이정환닷컴)

금산분리 원칙은 비금융주력자(재벌)가 은행 등 금융회사의 경영권을 지배하여 사금고로 활용해서 계열사를 확장하고 경제력을 집중시키는 상황을 원천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세계적으로도 산업자본이 은행을 소유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우 리나라에서 산업자본의 비은행 금융기관 소유는 이미 허용돼 있고 엄밀히 말하면 은산분리를 폐지하자는 이야기다. 자본 규모를 감안하면 결국 은산분리를 폐지하자는 주장은 삼성이나 LG, 현대 등 재벌 대기업에 은행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하자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심상정 의원은 참여정부 관료들과 한나라당 대선 후보가 금산분리 완화를 주장하는 것은 삼성 앞에 줄서기를 하겠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심 의원은 “삼성을 매개로 참여정부, 그리고 한나라당이 은산분리 완화를 매개로 대연정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17일 국감에서 권오규 경제 부총리는 “삼성 보고서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며 일개 그룹이 정부 정책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삼성생명 임원도 “문제가 되고 있는 문건은 그룹 차원에서 작성한 것이 아니”라며 “은행업 진출은 전혀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경제개혁연대는 성명을 발표하고 “각계에서 진행된 것으로 보이는 금산분리 원칙 완화 작업에 대한 진상 조사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제개혁연대는 또 “금융감독관계자 등에 대한 삼성그룹 측의 로비가 밝혀진다면, 국회가 그에 대한 엄정한 책임을 물을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참 여연대도 이명박 후보를 겨냥, “이 후보는 금산분리 폐지에 관한 자신의 주장이 삼성그룹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에 대해 국민들에게 명명백백하게 공개해야 한다”면서 “그렇지 않을 경우 이 후보의 금산분리 폐지 주장은 대중적 설득력을 결여한 채 삼성의 나팔수라는 인식에서 자유스럽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번에 공개된 문건은 삼성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다시 한번 고민하게 한다. 삼성의 힘은 법과 제도를 바꾸고 여론의 방향을 흔들만큼 강력하다. 경제 관료들은 삼성이 만든 시나리오에 따라 춤을 추고 언론은 기꺼이 이들의 논리를 확대 재생산해 왔다. 이 문건은 그 빙산의 한 조각일 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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