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비마을’ 사람들은 집값과 주가는 늘 오르기만 한다고 믿었다. 또 금리와 물가는 늘 내리기만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빚을 내고 펑펑 돈을 쓰느라 바빴다. ‘절약마을’ 사람들은 거꾸로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저축을 하고 공장을 짓고 물건을 만들어 팔기만 했다.
그러다 보니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더 이상 빚을 내기 어려운 지경까지 왔다. 집값과 주가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낭비마을’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절약마을’ 사람들이 이제 우리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겠대. 빚을 갚으라고 난리들인데 이제 우리는 뭘로 먹고 살지?”
‘절약마을’ 사람들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낭비마을’ 사람들이 물건을 사주지 않으면 이제 우리는 뭘로 먹고 살지?”
미국을 ‘낭비마을’에, 아시아를 ‘절약마을’에 비유한 것은 워런 버핏의 아이디어다. 바야흐로 ‘팍스 달러리엄(pax dallorium)’의 시대가 저물고 있는 시점에 이 비유는 딱 들어맞는다.
팍스 달러리엄 시대 저문다.
미국의 경제주간지 포천은 16일 “미국의 소비 축제는 끝났다”고 단언했다. “앞으로 미국인들은 과거처럼 마음껏 돈을 쓸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18일 스티븐 로치 모건스탠리아시아 회장의 말을 인용, “자산가격이 상승하면 소비가 증가하는 부의 효과에 의해 미국 경제가 성장해 왔지만 이제 미국의 부의 효과는 끝났다”고 지적했다. 로치는 “서브프라임 문제는 당분간 회복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여 미국 소비는 감소할 수밖에 없고 결국 미국 경기의 침체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전망했다.
로드리고 라토 IMF(국제통화기금) 총재도 23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연차 총회에서 “달러화 급락이 달러 자산에 대한 신뢰감을 잃게 만들고 달러화 가치가 다시 급락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한국금융연구원도 21일 “미국의 지속적인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를 감안할 때 글로벌 달러 약세는 내년중에도 계속될 전망이 우세하다”고 주장했다.
물론 미국이 쌍둥이 적자를 줄이기 위해 일부러 달러화 약세를 방치하는 측면도 있다. 당장 수출이 늘면 무역적자가 줄어들고 대외 부채가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효과도 있다. 8월 말 기준으로 미국의 무역적자는 전달보다 2.4%나 줄어들었다.
한국경제는 “중국이 의도적으로 위안화 가치를 낮게 유지해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 미국 시장을 공략하면서 무역수지 적자가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달러화가 약세를 나타내 무역적자를 줄여주는데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분석했다. 한경은 “미국이 겉으로는 강한 달러 정책을 표방하고 있으면서도 속으로는 약달러를 즐기고 있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막무가내 언론, “세금 풀어 환율 방어해달라”
주목할 부분은 언론이 달러화 약세를 보는 방식이다.
매일경제는 22일 “금리와 환율을 효과적으로 조정해 선제적 방어를 해야 한다”는 이필상 고려대 교수의 칼럼을 실었다. 이 교수는 “종합부동산세와 양도소득세 중 한쪽이라도 풀어 경제의 중심부에 있는 부동산 시장에서 거래가 살아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기업 관련 규제를 과감하게 풀어 시중의 과잉 유동성을 산업자금으로 흐르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머니투데이는 22일 “달러 약세가 이어지면서 원화 가치 절상에 대한 압력이 높아지는데 환율 당국은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고 질타했다. “유류세 인하 등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한국경제도 23일 “한국은행은 외환시장 개입을 통해 환율의 추가적인 하락을 막아야 한다”는 김정호 연세대 교수의 칼럼을 실었다. 김 교수는 다만 “주식시장의 버블을 억제해 과도한 외국 자본의 유입을 줄이고 금리 차이로 인한 국내 금융회사의 외화 차입을 억제하는 조치 또한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정부의 환율 개입이 필요하긴 하지만 막대한 외환시장 개입 비용을 줄이기 위해 다른 대안을 찾자는 이야기다.
언론은 철저하게 수출 기업의 입장에서 환율 문제를 보고 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세금을 쏟아 부어 환율을 방어해달라는 주장까지 온다.
그러나 세계적인 달러화 약세를 우리나라 정부가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소비자 입장이나 경제 전체로 볼 때도 환율 하락이 꼭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건 아니다. 수출은 어려워지겠지만 수입 물가가 낮아지고 소비 심리가 개선되면서 내수 시장을 확대하는 효과도 있다. 오히려 내수가 견인하는 고용 창출도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경제지들이 호들갑을 떠는 것과 달리 환율 하락이 수출기업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도 그리 크지 않다는 분석도 있다. 환율 하락 이상으로 수출 단가를 높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환율 하락이 세계적인 추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환율이 하락하고 있고 우리나라는 상대적으로 하락 폭이 작다. 이 말은 곧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환율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이야기다.
동양종합금융증권 이동수 연구원은 “지난해 말 대비 10월2일 달러화 대비 기준 환율을 놓고 보면 우리나라는 1.5% 떨어졌는데 캐나다와 브라질, 호주, 태국, 인도 등은 10% 이상 떨어졌다”고 지적했다. 대만이나 멕시코, 일본만 우리보다 적게 떨어졌다.
실제로 달러화 대비 환율은 떨어졌지만 원화 환율은 멕시코와 대만을 제외하고 대부분 올랐다. 특히 호주나 뉴질랜드, 유럽, 캐나다, 인도, 태국, 브라질 등은 많게는 15% 이상 환율이 올랐다. 이 말은 곧 이들 나라들에 대해서는 수출 경쟁력이 높아졌다는 이야기다. 미국 수출 둔화를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다. 한편으로는 그만큼 미국 경제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졌다는 이야기도 된다. 이미 올해 8월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수출 가운데 미국과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은 18.2% 밖에 안 된다.
당장 국제 유가와 곡물 가격, 원자재 가격 등이 급등하는 상황에서 환율 하락은 이를 부분적으로나마 상쇄시켜주는 역할도 한다. 조선일보는 톰마소 파도아스키오파 이탈리아 재무장관의 말을 인용, “만약 6년전 환율이었다면 우리는 지금 배럴당 90달러가 넘는 원유 수입에 훨씬 더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한다”면서 “강한 유로가 유가 상승의 충격을 흡수해준다”고 전하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달러화 약세는 지난 수십년간 이어온 불균형이 해소되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다. ‘낭비마을’ 사람들은 이제 분에 넘치는 소비를 줄여야 한다. 빚도 줄여야 한다. ‘절약마을’ 사람들은 허리띠만 졸라 맬 게 아니라 돈을 좀 써야 한다. ‘절약마을’ 사람들이 돈을 쓸 수 있도록 낭비 마을 사람들은 제 값을 주고 물건을 사야 한다. 그래야 경제가 돌아간다.
핵심은 달러화 약세를 감당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팍스 달러리움의 퇴조는 불가피할 전망이다. 서울경제는 표한영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원은 “우리가 미국경제 의존도를 단계적으로 줄이지 않는 이상 기축통화 위상 변경은 부정적으로 작용할 여지도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