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 케임브리지대학 교수는 최근 출간한 ‘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은 애초에 동등한 경쟁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선진국들은 보호무역으로 성장했으면서 이제 와서 개발도상국들에게 자유무역을 강요한다. 겉으로는 돕는 척하면서 개발도상국을 수탈하려는 의도라는 이야기다.
그가 선진국을 ‘나쁜 사마리아인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는 “역사적으로 선진국의 경제발전은 세계화와 자유무역이 아니라 보호무역과 보조금, 각종 특허와 지식재산권 보호에 기초했다”고 지적한다. “최근 세계화 논의는 결국 선진국 기업들에게 더 많은 이득을 가져다 주기 위한 전략”이라는 이야기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사다리 걷어차기.
그는 이런 움직임을 일찌감치 ‘사다리 걷어차기’에 비유하기도 했다. 선진국들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는 후진국들이 쫓아오지 못하도록 사다리를 걷어차 버린다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선진국들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얼굴을 하고는 시장 개방과 자유무역을 강요한다.
최근 국부펀드를 둘러싼 논란도 이런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노쇠한 미국과 달러화 약세를 틈타 세력을 넓히고 있는 후진국의 국부펀드는 후진국들이 선진국으로 올라가는 사다리일 수도 있다. 선진국들은 이 사다리를 걷어차려고 하고 있고 후진국들은 이 사다리를 새로운 가능성과 기회로 보고 있다.
모건스탠리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국부펀드의 규모는 2조5000억 달러에 이른다. 세계 외환보유액 5조1000억 달러의 절반에 이르는 규모다. 중국과 중동 산유국 등이 넘치는 외환보유액을 운용하기 시작하면서 세계 금융시장의 큰손으로 떠오른 지 오래다. 중국 정부가 2000억 달러, 아랍에미리트의 아부다비투자공사가 8700억 달러의 펀드를 운용하고 있다.
미국 사냥에 나선 차이나달러.
선진국들은 자신이 이들 개발도상국의 투자대상이 됐다는 데 놀라고 당혹해 하는 상황이다. 특히 핵심 경쟁산업이나 기간산업을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올해 5월에는 중국 국부펀드가 미국계 사모펀드 블랙스톤을 인수하자 독일 정부가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블랙스톤이 독일 도이치텔레콤의 지분 4.5%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국부펀드 투자를 규제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나오는 것도 이런 우려에서다.
카타르 투자청은 영국 증권거래소 지분을 인수했고 중국개발은행은 투자회사 바클레이스의 지분을 인수했다. 11월2일 새로 취임한 IMF(국제통화기금) 도미니크 스트로크 칸 총재는 “국부펀드의 도전을 경계해야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한국경제는 5일 <3차 세계대전 금융시장선 이미 시작됐다>에서 “개도국 국부펀드가 선진국의 항만, 에너지와 같은 기간산업을 인수하기 시작하면서 선진국들이 경제 안보상 위험을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2차 대전 이후 세계화를 외쳐왔던 선진국들이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는 경제 애국주의로 나가면서 자원 보유국을 중심으로 한 국수주의 움직임 등 개도국들의 반발도 심해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한국경제는 “원유를 비롯해 국제 원자재 가격의 고공행진이 지속되고 있는 것은 이런 요인이 작용하고 있어서”라고 설명했다.
국민일보는 10월31일 <국부펀드 기침하면 세계경제 독감>에서 미국 월스트리트저널 등의 논리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국민일보는 “수천억 달러를 석유선물시장에 투입해 국제 유가를 수요공급의 논리와 상관없이 끌어올리고 블랙스턴이나 칼라일 등 미국 초대형 투자금융회사까지 손을 뻗쳐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위기로 인한 국제 신용불안 사태를 부채질했다”고 비판했다.
우리가 하면 투자, 너희가 하면 투기?
미국 언론이 후진국의 국부펀드에 보이는 반응은 우리가 하면 투자, 너희가 하면 투기라는 다분히 억지스러운 편가르기라고 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투자든 투기든 그런 약육강식의 논리가 이 시장의 핵심 운영원리 가운데 하나고 아무도 국부펀드의 움직임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미국 헤지펀드들이 최근까지도 남미 등에서 벌여왔던 약탈적 투자행태를 돌아보면 더욱 염치없는 짓이다.
국내 언론이 다분히 미국의 이해를 반영한 이들 언론의 주장을 단순히 인용 보도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매일경제는 10월30일 <세계 금융시장에 국부펀드 경계령>에서 “미국 뿐만 아니라 독일과 프랑스도 이미 외국인 투자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해외 국부펀드의 자국기업 투자에 대한 감시장치를 마련하고 있다”고 전했다. 아시아경제도 같은 날 <"국부펀드 횡포 막게 재갈 물려라">에서 월스트리트저널을 인용, “G7 재무장관들이 ‘IMF와 세계은행이 국부펀드의 구조와 신뢰도, 투명성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전했다.
선진국들이 국부펀드를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도 살펴보면 논리가 궁색하다. 미국과 유럽의 투자자들이 중국이나 중동 지역에 자유롭게 투자할 수 있을 때 국부펀드도 미국과 유럽에 자유롭게 투자할 수 있다는 것. 또 투자 내역을 공개해야 한다는 것, 경영권 지배를 제한해야 한다는 것, 정부의 지원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 등이다.
미국과 유럽은 이들 나라에 투자할 때 전면적인 개방과 투자 자유화, 자유무역을 요구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들이 투자대상이 될 때는 규제를 이야기한다. 전형적인 사다리 걷어차기라고 할 수 있다.
금융 허브라는 사다리.
한국은 어떤 상황일까. 이 3차 대전에 더 늦기 전에 뛰어들어야 할까. 사다리가 사라지기 전에 올라타서 한국도 사다리를 걷어차 버려야 할까. 아니면 이 세계적인 투기장에서 기회를 노려야 할까. 노무현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해 왔고 언론이 동조하고 있는 금융 허브 구상은 한국도 이 사다리에 올라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서 출발한다.
서울경제는 10월23일 국내 국부펀드의 현황을 소개하기도 했다. 서울경제는 “차이나·오일달러와 달리 우리나라 국부펀드는 아직 미약한 실정”이라며 “재정경제부와 한국은행의 입장이 다른데다 운용규모가 경쟁국에 비해 작고 소극적인 투자행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서울경제는 재경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 “동북아 금융허브 추진을 위해서라도 국부펀드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매일경제는 7일 <게임이론과 국부펀드>에서 “한국투자공사도 200억 달러의 국부펀드”라며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일 없도록 글로벌 투자은행의 정보를 십분 활용해 운용 능력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짚고 넘어갈 부분은 과연 이 사다리가 선진국 또는 부자 나라로 가는 사다리냐는 것이다. 한국경제 한상춘 연구위원이 지적하고 있듯이 분명한 것은 두 가지다. 첫째, 경제 여건이 받쳐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한동안 주가는 오를 것이라는 사실, 둘째, 금융시장이 그 어느 때 못지않게 빠른 속도로 투기화할 것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