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이야기 할 수는 있지만 재협상을 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19일 이명박 대통령의 한미 정상회담 기자회견에서의 발언이 논란이 되고 있다. 군색한 해명을 내놓긴 했지만 해명 역시 모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상당수 국내 언론은 벌써부터 자동차를 조금 양보하더라도 한미 FTA를 조속히 추진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정부만 다급한 것이 아니라 언론 지면 곳곳에서 조바심이 묻어난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자동차가 미국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면 우리는 다시 이야기할 자세가 돼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부 언론이 온라인 판에서 “한미 FTA 자동차 재협상” 등의 제목을 뽑으면서 확대해석되는 조짐을 보이자 이날 오후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이 나서서 “이 대통령의 발언은 미국에서 문제가 있다고 하니까 어떤 것을 가져오면 논의를 해보겠다는 뜻이지 재협상이나 추가협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이날 뉴욕타임즈 보도를 보면 이 대통령의 발언을 “자동차가 문제가 된다면 우리는 다시 이야기할 자세가 돼 있다(If automobiles are a problem, we are in a position to discuss them again)”고 그대로 인용했으면서도 이를 “한국은 부가적인 협의를 위한 대화의 문을 열어놓고 있다(Seoul has left the door open for discussions for side deals)고 해석하고 있다. ‘재협상’이나 ‘추가협상’이 아닌 ‘부가적인 협의(side deal)’라는 표현을 쓴 것이 주목된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 대통령은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일 의지가 있다고 밝혔으나 재협상은 안 된다는 사회적 압박을 받고 있다(But the government faces the public perception that the current deal shouldn’t be renegotiated)”고 전했다. 이 신문은 “이 대통령이 미국에 아부하는 것처럼 비춰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Mr. Lee’s government is wary of appearing to kowtow to the U.S.)”고 지적하기도 했다.

블룸버그통신은 “오바마가 다른 돌파구를 찾을 것 같다(Possibly in Seoul the president will achieve another breakthrough)”는 전망을 내놓았다. 다시 대화를 시작하자는 이 대통령의 발언을 두고는 하루 전까지만 해도 재협상은 절대 없다던 한국 정부가 “태도를 180도 바꾼 것처럼 보인다(Lee’s comments appear to mark an about-face)”고 평가하기도 했다. 재협상 수준의 새로운 논의가 시작될 거라는 의미다.

미국 언론들의 신중한 관측을 종합해 보면 재협상이나 추가협상은 안 된다는 우리 정부의 입장을 정확히 지적하면서도 변화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특히 뉴욕타임즈가 언급한 ‘부가적인 협의(side deal)’는 기존 협정문을 그대로 둔 채 ‘부속 협정(side agreement)’를 추가하는 형태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1994년 북미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할 때도 부속협정을 추가한 적 있다.

결국 최대 관심은 미국이 어느 수준의 요구를 할 것이며 과연 우리 정부가 이를 수용할 것이냐에 쏠려 있다. 20일 국내 언론들은 크게 손해 볼 게 없다면 자동차에서 일정 부분 양보를 하더라도 미국 의회를 움직여서 한미 FTA를 비준시켜야 한다는 반응이 많다. 오히려 이를 계기로 농업과 서비스업 분야에서 우리 쪽에 유리한 조건을 끌어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재협상은 없다는 정부의 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일단 대부분 언론이 이미 자동차 부문 협상이 미국에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돼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8%의 관세를 즉각 철폐하기로 한 반면 미국은 3000cc 미만은 2.5%의 관세를 즉시 철폐, 3000cc 이상은 3년 동안 단계적으로 철폐하기로 했다. 픽업트럭의 경우는 25%의 관세를 10년에 걸쳐 철폐하기로 했다. 심지어 미국 자동차에 유리하도록 특별소비세를 개편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주목할 부분은 지난해 우리나라가 미국에 70만대의 자동차를 수출했던 반면 미국은 우리나라에 5천대 정도 수출하는데 그쳤다는 사실이다. 미국 자동차 회사들이 불만을 갖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나라는 이미 관세를 즉각 철폐하기로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양보할 부분이 많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미국 자동차가 팔리지 않는 건 연비가 높은 대형차가 많은데다 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상당수 언론이 자동차를 양보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입장을 보이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어차피 국내 시장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고 어떻게든 한미 FTA가 통과되면 수출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보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정부가 자동차에 대한 미국의 요구를 어느 정도 들어주는 대신 농업·서비스 분야의 이권을 미국에 요구할 것이라는 관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전했다.

서울신문은 “오바마 서울거리 수입차 제대로 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미국 자동차 업계의 보호주의와 미국 의회의 눈치보기의 늪에 빠진 협정문을 이젠 꺼낼 때가 됐다”면서 “자동차 같은 지엽적인 문제를 벗어나 큰 틀에서 바라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신문은 “무역 활성화 조치를 외면하면 미국은 아시아 시장에서 따돌림을 당할 것이라는 워싱턴포스트의 경고를 흘려듣지 말기를 바란다”고 충고를 늘어놓기도 했다.

주 목할 부분은 대부분 언론 보도에서 한미 FTA를 조속히 비준해야 한다는데 아무런 반대 의견이 없다는 사실이다. 투자자 국가 소송제나 지식재산권 직접 규제, 역진 방지 조항, 서비스 시장 네거티브 개방 등 독소조항에 대한 논란도 사라졌다. 미국이 반대하고 있으니 우리에게는 이로울 것이라는 막연한 논리다. 심지어 한겨레조차도 이를 계기로 유리한 조건을 끌어내자는 쪽으로 방향을 맞추고 있다.

한겨레는 “우리 정부의 가장 현명한 자세는 이번 기회에 그동안 논란이 됐던 독소조항들을 모두 재협상 테이블에 올려놓고 거꾸로 공세를 취하는 것”이라며 “이렇게 되면 미국 의회의 신통상법안 논의 결과에 따라협상의 주도권을 쥘 수 있다”고 지적했다. 동아일보는 “우리가 미국에 열린 자세로 대응할 테니 그쪽도 빨리 의견을 정리해 비준작업에 속도를 내라는 요구”라는 청와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이를 테면 ‘유리한 FTA’라면 해도 좋다는 분위기가 은근슬쩍 자리를 잡고 있는 셈인데 우선 “미국은 불리, 우리는 유리” 또는 “미국은 반대, 우리는 찬성”이라는 도식화된 관측부터 문제가 있다. 미국 자동차 업계가 거세게 반발하고 있고 이들의 지지와 후원을 받고 있는 오바마 대통령이 난처한 상황인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 의회에서도 찬반 양론이 엇갈리는 가운데 찬성 입장이 더 많다.

정리하면, 정부가 재협상은 없다고 강조하면서 추가 논의의 가능성을 열어둔 것은 협정문은 그대로 둔 채 한미 양국의 반대여론을 적당히 무마하는 수준의 상호 양보를 통해 한미 FTA를 강행하겠다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자동차가 이슈로 떠오르면서 본질이 가려져 있지만 한미 FTA를 둘러싼 숱한 논란은 전혀 해결된 바가 없다. 독소조항은 그대로 남아있고 전망은 터무니없이 부풀려져 있으며 피해를 볼 산업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도 없다.

안타깝게도 한국에만 유리한 FTA는 없다. 한미 FTA는 결국 한국과 미국 자본의 이해관계가 맞닿는 지점이다. 국익이라는 건 허상일 뿐이고 자동차를 둘러싼 줄다리기는 이를 은폐하는 지엽적인 논쟁이다. 자본의 무한증식을 보장하기 위해 국경을 허물고 규제를 철폐하는 과정에서 치러야 할 사회적 연대와 공공부문의 붕괴에 대한 아무런 준비도 우리는 돼 있지 않다. 조바심을 낸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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