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노조가 여론의 압박에 밀려 파업철회를 선언했던 3일, 현대자동차그룹이 한국경영자총협회를 탈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노사갈등에 이어 사사(使使)갈등이라는 평가까지 나왔다. “경총이 최근 노사관계 선진화방안과 관련하여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게 공식적인 이유다. 더 구체적으로는 경총이 복수노조 허용을 3년 유예하기로 한국노총과 합의하면서 현대차그룹의 심기가 뒤틀린 때문으로 분석된다.


언뜻 보면 이 사안은 기업들이 복수노조 허용을 요구하고 있는데 노동계가 이에 반대하는 양상으로 비춰진다. 경총이 단호하게 밀어붙이지 못하고 노동계의 요구를 수용한 것 때문에 현대차가 화를 내고 박차고 나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기업들이 복수노조 허용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노동계가 복수노조 허용을 결사반대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사사갈등의 당사자들이 바로 삼성그룹과 현대차그룹이다.

현대차가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를 즉각 시행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는 반면 삼성은 한발 물러나서 관망하는 입장이었다. 드러내 놓고 주장하지 않았을 뿐 삼성은 복수노조 허용을 완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일부 언론이 삼성과 현대차의 입장 차이에 주목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허용하는 쪽이나 반대하는 쪽이나 결국 노조의 무력화가 진짜 이유이기 때문이다.

현대차가 복수노조를 허용하자고 주장하는 건 노노갈등을 유발시켜 노조의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서다. 오랑캐로 오랑캐를 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인 셈이다. 반면 삼성은 아예 노조가 없다. 삼성은 노조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발견될 경우 이름만 있는 유령 노조를 내세워 노조 설립을 아예 차단하곤 했는데 만약 복수노조가 허용되면 노조 설립을 차단할 명분이 사라지게 된다. 사슴을 말이라 우기는 지록위마(指鹿爲馬)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복수노조 허용과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는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린다. 노동계 역시 복수노조 허용의 대의에는 동의하면서도 노조의 분열을 우려해 이를 반대하거나 미온적으로 대처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노동계 입장에서는 노조 전임자 임금이 훨씬 더 절박한 현안일 수밖에 없는데 경총은 이를 이용해 전임자 임금을 양보하면서 다른 유리한 조건을 끌어내 왔다. 지난 2006년 복수노조 허용이 3년 유예됐던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삼성이 복수노조 허용을 반대한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지만 함부로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는 음습한 음모였다. 참다 못한 현대차가 경총을 박차고 나오면서 이른 바 사사갈등이 수면 위로 떠올랐는데 여전히 대부분의 언론은 애매모호한 중립을 취하고 있다. 이와 관련, 현대자동차가 최대 주주로 있는 한국경제와 과거 삼성의 계열사였던 중앙일보의 상반된 보도 태도를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한국경제는 노골적으로 현대차의 입장에 서 있다. 이 신문은 강성노조 때문에 현대차가 얼마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를 설명하는데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이 신문은 “전임자가 줄어들면 노조의 발목 잡기도 줄어들고, 노사관계도 합리화할 것으로 현대차는 기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정작 경총과 현대차가 왜 불화를 겪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반면 중앙일보는 삼성의 입장을 대변하느라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고 있다. 이 신문은 “협력적인 노사관계가 구축된 회사는 다른 노조가 들어와 이런 기조에 균열을 발생시키지 않을까 두려워 한다”면서 “복수노조가 되면 더 강경한 노조가 장악할 것”이라는 한국노총 장석춘 위원장의 발언을 인용하기도 했다. “이들 기업은 노조전임자에게 주는 임금은 협력적인 노사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지출할 수 있다는 입장”이라고 설명한 대목도 눈길을 끈다.

특히 기업들 이름을 이니셜 처리한 배경도 흥미롭다. “복수노조·전임자 무임금 문제가 경영계 내부의 갈등으로 비화되고 있다”면서 “D·H·K·L·S그룹 등은 현대·기아차그룹의 입장에 동조한다”면서 “반면 S·P·L사는 복수노조만큼은 시행을 미루거나 시행해서는 안 된다며 경총에 힘을 보태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서 복수노조 허용을 반대하는 S·P·L사는 노조가 없거나 유명무실한 삼성과 포스코, LG그룹이다.

삼성을 대변하면서도 정작 삼성의 이름을 쓸 수 없는 중앙일보의 곤혹스러운 입장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 신문의 진짜 의도는 “복수노조가 허용되면 비노조 기업에 노조가 설립될 가능성이 커진다”는 문장에서 드러난다. 이들 기업들이 복수노조 금지를 근거로 유령노조를 내세워 노조 설립을 차단해 왔다는 사실을 시인한 셈이다. 이들이 두려워하는 건 복수노조가 아니라 하나의 진짜 노조라는 이야기다.

한편 한겨레가 작정한 듯 삼성을 전면에 내세워 강한 비판을 쏟아낸 것과도 대조된다. 이 신문은 “현대차는 노사관계에서 삼성그룹 때문에 끌려 다니고 있다는 강박감이 있다”면서 “경총의 특정 임원을 통해 삼성그룹의 견해가 반영됐다”는 경총 관계자의 말을 인용했다. 현대차를 비롯해 다른 기업들은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가 더 시급한 사안이라고 생각하는데 삼성의 입김 때문에 복수노조 허용 유예가 우선 과제로 받아들여졌다는 이야기다.

현대차를 이용해 삼성을 공격하는 한겨레의 보도 태도도 이이제이 전략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겨레는 정작 노조를 무력화하겠다는 의도를 숨기지 않고 있는 현대차에 대해서는 비판의 칼날이 무뎠다. 현대차 관계자가 “삼성이 배후에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맞다”고 긍정했다는 대목도 논란의 본질을 삼성과 현대차의 갈등으로 좁히는 인상을 줬다. 이 와중에 ‘둘 다 나쁘지만 삼성이 더 나쁘다’는 비판이 적절한 것일까.

기업들이 제각각 이해관계에 따라 사안을 재단하고 있지만 핵심은 복수노조를 허용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다. 복수노조는 당연히 허용돼야 하고 다만 복수의 노조에 교섭권을 어떻게 부여할 것이냐 그리고 소수 노조를 배제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다. 기업들이 복수노조 허용 또는 금지를 노조를 무력화하는 수단으로 악용하는 것을 경계해야 할 텐데 엉뚱하게도 현대차가 옳은가 삼성이 옳은가의 논쟁으로 변질돼 가는 분위기다.

그리고 노조 전임자 임금 문제는 애초에 노사자율에 맡겨둘 일이지 정부와 언론이 나설 일이 아니다. 임금을 없애서 노조를 무력화하겠다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 기업이나 이를 버젓이 지면에 옮겨 싣고도 아무런 비판도 없는 언론이나 부끄럽기는 마찬가지다. 복수노조 논란은 아예 산으로 가고 있다. 노동자들의 권리는 아예 뒷전이고 어느 기업에 더 유리한가를 놓고 언론이 대리전을 벌이고 있다. 노동계는 잔머리를 굴리느라 우물쭈물하고 있다.

Similar Posts

Leave a Reply